미국 대학원은 보통 12월에 원서 접수를 마감한다. 이에 맞춰 지원자들은 대개 9월부터 지원할 학교들에 대한 검색을 시작하여 10월까지는 어느 정도 본인이 지원할 학교들의 목록을 결정하게 된다.
내가 만약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학점이 더 좋았더라면, 그리고 영어 점수가 더 훌륭했더라면, 아마도 큰 고민 없이 소위 말하는 랭킹 순으로 쭉 지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낮은 학점, 그리고 그리 특별하지 않은 영어 점수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지만, 냉정하게 바라본 나 자신은 탑스쿨은커녕 모든 학교에서 불합격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스펙 쪽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미국에는 탑스쿨 말고도 괜찮은 학교들이 많이 있으며, 내가 가진 약점들을 커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점들을 잘 어필한다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사람이기에 이왕이면 좀 더 랭킹이 높은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설령 어찌어찌해서 운 좋게 내 실력에 비해 과분한 학교에서 어드미션을 받는다고 해도, 나보다 훨씬 뛰어난 학생들 사이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지원 학교 리스트의 포트폴리오를 최대한 다변화시켜서, 주요 타깃은 (U.S.News 기준으로) 30~50위권의 학교들로 잡고, 30위권 내의 학교들은 내 관심분야와 겹치면서도 비교적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인 곳들을 추가하기로 했다.
지원 학교 목록을 최종적으로 정하기 전에 내가 했던 일은 각 학교에 현재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에게 한 명, 한 명씩 이메일로 컨택을 해서, 내가 궁금한 정보들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학과 홈페이지에 공식적으로 게시된 정보들은 현실과는 어느 정도 괴리가 있기 마련이어서, 실제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로부터 듣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가장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재학생들에게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 비율은 100%였다. 아무런 관련 없는 낯선 사람이 보낸 메일에, 다들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모습들에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각 학교의 펀딩 상황, 퀄 시험 탈락률, 강점을 가지고 있는 분야, 학과 분위기 등에 대한 아주 귀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고, 이런 정보들이 최종 지원학교들을 정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프로세스를 거쳐 약 25개의 학교들로 구성된 리스트를 10월 말에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추천서는 직장 상사 한분, 석사 지도교수님 두 분, 그리고 미국 정부 연구기관에 계신 미국인 박사님 두 분, 이렇게 총 다섯 분께 적절하게 숫자를 배분해서 부탁드렸다. 참고로, 다섯 분 모두 내가 지원하는 전공 관련 박사 학위를 가지신 분들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다들 탑스쿨 출신이었다.
아무래도 이분들 시각에서 보면 내가 지원하는 학교들의 랭킹이 좀 낮게 보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래서인지 미국인 박사님 한분께서는 당신의 모교(학부, 대학원) 두 곳에 지원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말씀을 하셨다. 그분께 이실직고 '제가 박사님이 나오신 그 학교들에 합격할 수 있는 확률은 0%입니다'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원래 전혀 지원할 생각이 없었던 탑 10 학교들 몇 곳이 이런 식으로 반강제적(?)으로 최종 지원학교 목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쨌든, 여러 분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12월 말까지 지원하려는 모든 학교들에 원서 접수, 서류 발송, 추천서 제출까지 무사히 다 끝마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 보통 합격/불합격 통지는 이르면 2월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3월에 본격적으로 쏟아지는데 원서 접수 후부터 그때까지는 조금 마음을 비우고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 숨 돌리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1월의 어느 날, 내가 지원했던 학교 한 곳으로부터 이메일 한통이 도착하였다.
긴장된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Thank you for applying for our Ph.D. program. You have a very impressive background. I’d like to arrange a Skype call with you to discuss your interest in our program.
(우리 프로그램에 지원해줘서 고마워. 근데 말이야, 너랑 스카이프로 인터뷰를 좀 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나의 생애 첫 화상 인터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