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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Jan 28. 2017

차를 사러 가다 (상)

차 없이 보낸 첫 일주일 동안 우리는 걸어서 동네의 이곳저곳을 탐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은 땅 자체가 넓다 보니 지도 상으로 가까워 보이는 거리도 실제로 걸어보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장을 보고 나서 무거운 짐을 들고 집까지 걸어오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다들 그렇듯, 언제 있을지 모를 응급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차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은행 계좌를 만들자마자 나는 한국 계좌에서 자동차 구입 비용을 미국으로 송금했다. 실제 돈이 미국 계좌로 입금되기 까지는 며칠이 걸렸는데, 나는 돈이 들어오는 날을 이른바 디데이(D-day)로 잡고 자동차를 사러 갈 준비를 차곡차곡 시작했다.


미국은 세계 각국의 자동차 브랜드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장이다 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많다. 하지만 선택의 폭이 넓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닌데, 수많은 브랜드와 모델들 가운데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내는 것도 힘들고, 딜러들마다 판매 가격과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얼마나 발품을 팔고 협상을 잘 하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지불하는 자동차 가격도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 온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나에게 '발품'이나 '협상' 같은 것들은 아주 먼 이야기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매장, 저 매장을 돌며 발품을 팔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했다. 차가 없어서 차를 사려고 하는데, 차를 사러 가려면 반드시 차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딜러와의 협상도 요원했다. 30년이 넘게 한국에서만 살았던 내가, 미국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딜러 앞에서 영어로 협상을 시도한다고 해도 얼마나 먹히겠는가. 오히려 덤터기를 안 쓰고, 제 가격에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비우고, 우리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딜러샵에서 KBB(Kelly Blue Book)Edmunds에 나와있는 기준 가격 정도에 차를 구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참고로 중고차는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는데, 중고차를 사서 혹시 중간에 고장이라도 나면 시간, 에너지, 비용도 많이 뺏기게 될 것 같았고, 박사 과정 자체가 워낙 길기 때문에 그냥 새 차를 사서 오래 동안 아무 문제없이 타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유학생들은 일본차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데, 일본차는 상대적으로 잔고장이 적고, 유지비도 적게 들고, 나중에 중고로 팔 때도 가격이 많이 안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이른바 '유학생 차'로 불리는 차들을 살펴보면, 중형 세단의 경우 토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닛산 알티마, 준중형에서는 토요타의 코롤라와 혼다의 씨빅, 그리고 SUV는 혼다의 CR-V와 토요타의 RAV-4 등이 있다. (대략 픽업트럭을 뺀 미국 내 판매량 탑 10에 드는 차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이가 있는 집은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기도 쉽고 트렁크에 짐을 싣고 내리기도 편한 SUV를 선호하는데, 토마스 씨는 이 가운데에서 혼다의 CR-V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중형 세단들 - 좌측부터 어코드, 알티마, 캠리)


그러다가, 미국으로 오기 바로 직전에, 내가 이제 다니게 될 학교에서 막 공부를 끝내고 귀국한 선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 선배에게 자동차 이야기를 꺼내면서, 어떤 차를 사는 게 좋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선배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선배: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스바루 사세요! 그 동네에서는 스바루가 최고예요.


스바루(Subaru)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스바루라는 말에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스바루라면,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소설에 등장했던 그 브랜드가 아니던가. 그리고 몇 번인가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스바루의 SUV를 보며, 참 특징 없이 무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차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인 나에게는,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들에 대한 맹신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가 달리기를 할 때 항상 신는다는 미즈노에 대한 호감처럼 말이다. 아무튼, 앞으로 내가 살게 될 도시에서 이미 6년이나 살고 온 선배가 직접 스바루를 사라고 한 이상, 그 말을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그 선배: 거기는 겨울에 눈이 꽤 많이 오기 때문에, 반드시 사륜구동차가 필요해요. 스바루는 모든 모델이 상시 사륜구동(AWD)이기 때문에 눈길에서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게다가 거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즐기기 때문에, 루프탑이나 트렁크에 짐을 잔뜩 싣고 어디 놀러 가는 것을 좋아해요. 장담컨데, 토마스 씨가 스바루를 샀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차 잘 샀네'라고 말할 거예요. 워낙 인기가 좋다 보니, 나중에 차를 중고로 팔 때도 가격이 많이 안 떨어지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나는 선배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내 머릿속의 자동차 위시리스트(wish list)에서 토요타, 혼다, 닛산 등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로지 스바루만을 남겨놓았다. 한국에서 보낸 돈이 체이스의 계좌로 하루빨리 입금되기를 기다리며, 나는 부지런히 인터넷에서 스바루의 딜러샵과 각 모델들의 가격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송금한 돈이 미국 은행의 계좌로 무사히 입금된 것을 확인한 날,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딜러샵에 차를 사러 가기로 했다. 구글맵을 통해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는 스바루 딜러샵에 대한 검색도 마쳤다. 그 딜러샵 홈페이지에서 내가 원하는 모델을 대략 얼마쯤에 팔고 있는지에 대한 검색도 끝냈다. 이제 딜러샵에 가서 덤터기 쓰지 않고, 차를 사 오기만 하면 됐다.


다음 날 아침, 지난번에 계좌를 만들러 은행에 갔을 때처럼, 꽃단장을 했다 (사회생활을 통해 "1대 1로 누군가를 만날 때는 적어도 차려입었다고 손해 보는 일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지난번처럼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각종 서류들 - 여권, I-20, 국제운전면허증, 아파트 렌트 계약서 - 을 가방에 넣었고, 차를 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수표(check)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새 차를 현금으로 사는 경우는 잘 없고, 대부분 할부로 구입을 하거나 리스를 한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한 번에 큰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매달 꼬박꼬박 할부 비용을 납부하면서 본인의 신용도를 올릴 수 있고, 딜러 입장에서도 할부로 팔게 되면,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둘 다 현금 거래보다는 할부를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씨처럼 미국에 온 지 갓 일주일 정도 지난 사람에게 과연 할부로 자동차를 판매할까? 할부로 차를 살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했고, 할부 이자를 매달 내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그냥 처음부터 현금으로 차를 사기로 했다. 물론, 현금 더미를 들고 간 것은 아니고, 며칠 전 체이스에서 계좌를 개설하면서 받은 개인용 수표 한 장만 있으면 자동차 구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수표 사용 방법(예를 들면, 금액을 어떻게 기재해야 하는지)을 미리 익혀 갔다.


집을 나서기 전, 아내와 토쥬군에게 "아빠 지금 나가서 차 한 대 사 올게"라고 말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짐작컨데, 미국에 온 이후로 내가 가장 비장한 얼굴 표정을 지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집을 나와 버스정류장에서도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버스에 올라타 요금을 지불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바에 따르면, 우리 동네 버스 요금은 2.25 달러였다. 요금통에 비장하게 1달러 지폐를 세장 넣은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거스름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버스 기사 아저씨는 비장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기사 아저씨: 우리 버스는 거스름돈 없어요.


그랬다. 한국 버스와는 달리, 여기 버스는 지폐를 넣어도 잔액을 동전으로 거슬러주지 않았다. 몰랐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0.75달러만큼을 수업료로 지불하며, 버스에서는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됐으니 괜찮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자동차를 사러 가고 있다. 그곳의 딜러와 나는 이제부터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하게 될 것이다. 나의 목표는 덤터기를 쓰지 않는 것이다. 0.75달러 정도는 잊자. 어느새 버스 창밖을 바라보는 내 표정은 다시 비장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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