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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Feb 11. 2017

운전면허증 (상)

한국에서 발급받아 온 국제 운전면허증으로 무사히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전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국제 운전면허증은 유효기간이 딱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내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여권밖에 없다 보니 어디를 가나 여권을 휴대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만약 여권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안에 들어있는 비자를 재발급받아야 하는데 이게 또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전 국민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연방차원의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각 주에서 발급하는 운전면허증을 신분증(ID Card) 대용으로 사용한다. 내가 사는 주는 운전면허증 발급 후 유효기간이 5년이라 한번 발급받으면 한동안은 만료될 걱정 없이 여권 대신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의 문제(국제 운전면허증의 짧은 유효기간 및 여권 분실 위험)를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 하루빨리 미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로 했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각 주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를 하는 것이고,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면 운전면허증이 발급된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이고, 경우에 따라서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운전면허 시험을 보지 않고도 미국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을 수도 있다. 바로 '한미 운전면허 상호인정 협정' 덕분인데, 대한민국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미국의 17개 주에서 별도의 운전면허 시험 없이 대한민국 운전면허증을 현지의 운전면허증으로 교환할 수 있다 (2016년 4월 기준, 운전면허 시험이 면제되는 미국의 17개 주 목록은 여기를 참조). 다행히 내가 앞으로 살게 될 곳도 '한미 운전면허 상호인정 협정'을 체결한 곳이어서, 운전면허 시험 준비 때문에 들여야 했을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아낄 수 있었다.


미국에 온 지 열흘 정도 지난 7월 말의 어느 평일 오전, 서둘러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우리 세 식구는 DMV(Department of Moto Vehicles, 자동차 관리국)를 방문했다. 여유롭게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점심으로 뭘 먹을지를 고민하며 DMV 오피스를 향해 걸어가던 우리는 잠시 후 펼쳐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DMV 오피스의 내부는 말할 것도 없고, 외부의 복도 바닥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비좁은 오피스 안으로 들어가 간신히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토마스 씨: 저 운전면허증 발급받으려고 하는데요.
안내 직원: 저기서 번호표 뽑으시고 기다리면 돼요.
토마스 씨: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안내 직원: 평균 3시간에서 4시간 정도 기다려야 해요.


한국에서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 들렀던 경찰서 민원실의 모습을 기대했던 나에게 무려 3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하는 DMV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참고로, DMV는 USPS(우체국) 및 IRS(국세청)와 더불어 '악명' 높은 미국의 3대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어떻게 면허증 하나 신청하는데 3시간이 넘게 걸릴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든 게 사실인데, 이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토피아(zootopia)라는 애니메이션에서 DMV 직원으로 등장하는 나무늘보(sloth) 캐릭터이다. 말하자면, DMV의 나무늘보는 기다리다 지쳐 속 터져 죽을 듯한 DMV의 이미지를 매우 적절히 풍자하고 있는 메타포라 할 수 있다.


미국의 DMV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주토피아의 나무늘보 캐릭터


아무튼, 나는 3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마음을 접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토쥬군이 돌을 갓 지났을 무렵이라 낮잠은 필수였기에 도저히 3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이와 함께 이곳에서 무작정 대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날 일찍 다시 오기로 했다. 9시에 문을 여니까 넉넉히 한 시간 정도 일찍 오면 많이 기다리지 않고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일단 토쥬군만 간단히 아침을 먹인 뒤, 우리는 바로 DMV로 출발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대략 8시 15분쯤이었는데, 이미 DMV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아... 더 일찍 나왔어야 했구나'라는 후회도 잠시, 우리는 서둘러 줄의 제일 끝으로 이동했다. 아직 문을 열려면 40분도 더 남았는데, 아내와 나는 우두커니 서서 토쥬군을 번갈아서 안으며 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리 바로 앞에 서있던 인상 좋은 여성분이 토쥬군을 보더니 너무 귀엽다며 아내에게 말을 걸었다. 


여성분: 아이가 너무 귀여워요. 몇 살이죠?
아내: 이제 돌을 갓 지났어요.
여성분: 그렇군요. 근데 문 열려면 아직 시간 많이 남았는데도, 사람 정말 많네요. 
아내: 사실 저희 어제도 왔었는데 3시간 넘게 기다려야 된다고 해서 오늘 다시 온 거예요.
여성분: 아... 다행이네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저는 오후에 왔어야 하나, 후회하고 있었어요. 근데 어디서 오신 거죠? 
아내: 저희 한국에서 온 지 이제 열흘 남짓 되었어요.
여성분: 우와. 굉장히 멀리서 왔군요. 그럼,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어요?
아내: 남편이 다니는 학교 아파트에서 살아요.
여성분: 아, 그래요? 혹시 거기 옆에 빨간 벽돌로 된 아파트도 있죠?
아내: 아... 지나가면서 본 것 같아요.
여성분: 저도 어렸을 때 거기 살았어요. 


그러면서 그 여성분은 핸드폰을 꺼내 본인의 아이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 이후로도 아내는 미국에 온 후 처음으로 현지인인 그 여성분과 오래 동안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9시가 가까워왔고, DMV 직원이 밖으로 나와 사전 주의사항에 대해 큰 목소리로 공지를 해줬다.


DMV직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조금 있으면 오피스 문이 열릴 거예요. 운전면허증 신청하려면 반드시 현재 거주지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들이 있어야 해요. 본인 이름이 나와있는 렌트 계약서나 공공요금 고지서, 혹은 우편물 같은 것들이 없으면 면허증을 발급받을 수 없으니까 주의하세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여성분이 당황하더니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거주지 증명 서류들을 미처 챙겨 오지 않아서, 가족에게 서류 좀 가져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DMV 입구의 문이 열렸고, 줄 제일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DMV 오피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우리도 오피스 안으로 입장했는데 입장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번호표를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번호표를 받고 나서는 다시 끝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졌다. (달라진 점이라면, 아까는 복도에서 서서 기다렸지만 이제는 오피스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는 것 정도)


각 창구 위에 붙어있는 대기 번호 전광판의 숫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바뀌지 않았다. (싱크로율 100%의 주토피아 동영상. 한번 보시죠!) 오피스 안에 설치된 의자는 일찌감치 만석이 되어서, 어제 DMV에 와서 봤던 것처럼 오피스 밖의 복도에도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졌는지, 다들 그냥 맨바닥에 앉아서 랩탑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있던 토쥬군이 슬슬 인내심의 임계치에 도달했는지, 갑자기 밖에 나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아내와 나는 번갈아가면서 한 명은 번호표를 들고 계속 앉아 있고, 다른 한 명은 토쥬군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놀아주기로 했다. 


그리고 10시 40분쯤이 되어서야 드디어 전광판에 우리 번호가 떴다. 우리 세 식구는 미리 챙겨 온 서류들을 들고 번호가 뜬 창구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큰 키에 마른 체형을 가진, 조금은 깐깐하게 생긴 여성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마스 씨: 저희 지금 대한민국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 면허증으로 교환하고 싶어요.
직원분: (이미 유사한 경험이 많은지) 알겠어요. 준비해온 서류들 주실래요?
토마스 씨: (아내와 나의 여권, I-20, 아파트 렌트 계약서, 한국 운전면허증 등을 건네며) 여기 있어요.
직원분: (서류들을 하나씩 검토하더니) 근데, I-94가 안 보이네요. 
토마스 씨: (당황하며) I-94가 뭐죠? 
직원분: (차가운 목소리로) I-94에 기재된 미국 입국 기록을 확인하지 않으면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줄 수 없어요.
토마스 씨: (운전면허증 발급이 안된다는 말에 더욱 당황하며...) I-94는 어디서 어떻게 발급받아야 하나요?
직원분: 인터넷으로 CBP(Cusmtoms and Border Protection, 세관 및 국경보호국) 사이트에 들어가서 본인 정보 입력 후에 I-94 양식 확인하고, 거기에 적인 번호 적어오세요.


DMV에 오기 전에 인터넷을 보며 필요한 서류들을 미리 챙긴다고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I-94가 필요하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예전에는 미국에 입국할 때 여권에다가 I-94 종이를 부착해줬기 때문에, 여권만 가져오면 I-94를 자연스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입국했던 무렵에는 I-94를 더 이상 여권에 부착하지 않고, 필요할 때 온라인으로 열람하게끔 시스템이 바뀌어서 면허증을 발급받으려면 반드시 미리 인터넷에서 I-94를 출력해서 와야 했는데, 나는 이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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