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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Mar 11. 2017

MBC FM 라디오

미국에 도착한 지 딱 2주 만에 시작된 수학캠프 기간 동안, 나의 오전 일과는 대략 이랬다.


오전 7시 30분 - 8시 : 기상 및 씻기

오전 8시 - 8시 30분: 아침 식사 (오트밀 또는 빵)

8시 30분 - 9시: 등교

9시 - 12시: 수학 캠프

12시 - 12시 30분: 귀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하늘은 항상 파란색이었다. 그리고 그 파란 하늘 아래는 푸르른 나무와 잔디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 이국적인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내뱉다가도, 이내 생각은 자연스레 멀리 떨어진 한국으로 향했다. 여기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듣든, 한국에 대한 생각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이 무렵의 나는, 학교를 오며가며 마주친 풍경들 속에서 무의식중에 자꾸 한국을 떠올렸다


이때를 돌이켜보면,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머물고 있는 상태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무렵에 항상 집에 MBC FM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토쥬군이 태어난 이후, TV를 끄고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우리 부부에게 MBC FM 라디오는 일종의 말동무 같은 존재였다. 한국에 있을 때도 전현무의 '굿모닝 FM', 이루마의 '골든 디스크', 김신영의 '정오의 희망곡',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종종 들었던 우리였던지라, 미국에 온 뒤에도 스마트폰으로 MBC 라디오 애플리케이션 '미니'를 다운로드 받아 스피커에 연결한 뒤 MBC FM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여전히 조금은 낯선 미국집의 거실에 전현무의 '굿모닝 FM'의 시그널 음악이 나올 때의 그 기분이란... 지금 한국은 다들 출근/등교 준비로 바쁠 아침 7시인데, 똑같은 방송을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서 오후에 듣고 있는 그 기분이란... 적어도 거실에 MBC 라디오를 틀어 놓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것과 거의 똑같았다. 한국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한국에서 먹던 것과 똑같은 밥, 국, 반찬을 먹고, 한국 노래를 듣고,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를 보고, 아내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그러다 보니, 집에 있다가 장을 보러 외출을 할 때면 아내와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분명, 지금까지 우리가 있었던 '집'이란 공간은 그야말로 한국이었는데, 집 밖으로 걸음을 한 발짝 내딛으면 신기하게도 공간이 미국으로 탈바꿈해버렸다. 현관문을 나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마트에 도착할 때까지 마주치는 풍경들, 마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마트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국의 집에서 놀고 있다가 갑자기 순간 이동을 해서 '해외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곤 했다. 요컨대, 이 무렵에는 내 마음속의 적지 않은 부분들이 여전히 한국에서 떠나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편, 시차 때문에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방송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에 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방송은 배철수의 '음악캠프'와 김현철의 '오후의 발견'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시차 때문에 이 방송들이 심야방송으로 변신을 한다. 게다가 '음악캠프'와 '오후의 발견'은 기가 막힌 노래 선곡이 핵심인 프로그램인데, 다시 듣기로는 노래를 들을 수가 없다 보니, 아쉽게도 미국에 온 이후로 이 방송들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미국 기준으로 한가한 오후에 방송되는 '굿모닝 FM', '오늘 아침', '골든 디스크' 등을 주로 듣게 되었다.


한 번은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아침'을 듣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이라는 노래가 나왔다. (오며 가며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집중해서 듣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아... 그런데 노래 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쏙쏙 꽂히는 것이 아닌가.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에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엔 네가 있어 그래


노래 가사처럼, 이 무렵의 나는 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에서, 피부로 느끼는 저녁의 공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자꾸 한국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때의 나는 한국과 미국,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저 '경계'에 머무르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언제쯤 나는 한국에 두고 온 마음들을 정리하고, 이 공간에 익숙해질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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