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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Dec 01. 2017

중간시험과 짜장면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되자, 나의 하루 일과도 규칙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오전과 오후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거나 티칭을 하고, 저녁에는 집에서 하루 동안 배운 것을 복습하고 숙제를 했다. 다행히 금요일에는 수업도 없고, 티칭도 없어서 이 날 하루만큼은 온전히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주말에 그동안 밀린 공부와 숙제를 하다 보면 다시 또 월요일이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개강 후 3주 차였던 9월 둘째 주에 느닷없이 눈이 왔다. 9월에 눈이라니... 한국이었으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눈 앞에서 펼쳐지니, 어찌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분명 며칠 전까지는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하루 만에 날씨가 바뀌더니 창밖으로 눈이 펑펑 쏟아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9월에 눈이 내린 것은 여기서도 굉장히 특별한 일이라고 했다. 다행히 눈은 하루 동안 반짝 내리고 그쳤지만, 갑자기 바뀐 기온 탓에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감기에 덜컥 걸려 버렸다.


9월에 내리는 눈을 보니, 내가 이국땅에 와있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한창 감기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그때, 첫 중간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 '첫 시험'이라는 부담감이 생각보다 컸던지, 한국에서 미리 조제해 온 감기약을 아무리 먹어도 이렇다 할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무렵에 아내도 감기에 걸려버렸고, 급기야 시험 바로 전날에는 둘 다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한 명이 몸이 안 좋을 때 다른 한 명이 토쥬군을 돌보면서 잠시나마 휴식을 취했을 텐데. 이번에는 둘 다 동시에 감기에 걸린 데다가, 나는 당장 다음 날에 시험까지 있어서 도저히 아내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결국 그날 나는 방에 들어가서 꾸역꾸역 시험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아내는 거실에서 혼자 토쥬군을 돌봐야만 했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그때 아내에게 참 미안했는데, 아내도 실제로 그때 참 힘들었다고 한다. (박사 과정 남편을 둔 아내분들 고생이 많으시죠? 힘내세요!!)


다음 날 아침, 시험을 보러 강의실로 들어갔더니 동기들도 다들 '첫 중간시험'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시험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시험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문제를 풀면서 몇 가지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전날 시험을 핑계로 아내를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고, 또 미안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본들 무엇하리... 한참 동안 스스로를 자책한 뒤, 나는 바로 다음 주에 있을 다른 과목의 시험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첫 시험의 성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교수님이 채점을 굉장히 너그럽게 해주신 덕분이었는데, 다음 시험에서는 좀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이런 다짐 덕분이었는지 그다음 주에 치른 두 번째 과목의 중간시험은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3주 뒤에 치를 세 번째 과목의 중간시험이 아직 남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첫 중간시험 두 개를 무사히 끝낸 기념으로 작은 이벤트를 하나 마련했다.


그 이벤트는 바로 "짜장면 먹으러 가기"였다. 한국에 있을 때, 주말이면 집으로 배달시킨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면서 '무한도전'을 보는 게 우리 부부에게는 삶의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 온 뒤 두 달이 지나고 나니 다른 어떤 음식보다도 짜장면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짜장면을 파는 곳이 없었다. 짜장면을 먹으려면 고속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서, 근처에 있는 대도시로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없어서 "짜장면"을 계속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중간시험 두 개를 끝낸 그 주의 화창했던 금요일 - 그토록 기다려왔던 "짜장면 먹으러 가는 날"이 되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처음 가보는 고속도로를 달려 짜장면을 파는 한국식 중화요리 식당으로 향했다. 차를 산 이후, 처음으로 뛰어보는 장거리 운전이기도 했다. 가다 보니 어느 순간 높은 빌딩들로 가득 찬 대도시의 모습이 보였는데, 서울을 떠나온 지 이제 겨우 두 달 조금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층 건물들이 어찌나 어색하게 느껴지던지...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3층 이상 건물들도 보기 힘들다보니, 이 정도의 건물들마저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우리는 작은 규모로나마 조성된 코리아 타운에 도착을 했고, 바로 중화요리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리 생각해 온 메뉴 - 짜장면, 탕수육, 볶음밥 - 를 주문했다. (좀 부끄럽지만, 볶음밥에 짬뽕 국물이 같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드디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다행히도 한국에서 먹던 그 맛과 비슷했다. 달라진 것이라면 예전에는 전화 한 통이면 집에서 편하게 TV를 보면서 이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특별한 날(이를테면, 이번처럼 시험이 끝났다던지...)에 큰 마음먹고 자동차로 한 시간을 꼬박 달려와서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탕수육 (이 순간에는 부먹/찍먹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래 이맛이지'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짜장면을 먹다 보니, 어쩌면 한국 사람의 소울푸드는 의외로 "짜장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국인의 "소울푸드"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는 짜장면


전 세계 어디에 있든, 때가 되면 저절로 생각나는 음식. 저마다의 추억들이 한두 개쯤은 깃들어 있는 음식 (예. 어린 시절 친구 집에서 먹었던 짜장면, 당구장에서 먹었던 짜장면, 이사한 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먹었던 짜장면 등). 아쉽게도 당분간은 집에서 TV를 보면서 짜장면을 먹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날 소박하지만 나름 특별했던 '소울 푸드' 외식을 통해 우리 부부는 적지 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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