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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스 Oct 09. 2017

첫 티칭의 긴장감 (하)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국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강의를 하게 된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전날 미리 출력해 놓은 워크시트(worksheet)와 출석부를 잘 챙겼나 가방을 열어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수업 시작 시간은 오전 8시였는데, 집에서 강의실까지는 걸어서 대략 10~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첫 수업부터 늦으면 안 되기 때문에 넉넉히 20분 전에 집에서 나왔는데,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어찌나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는지 모른다. 한글로 수업을 진행했다면 이 정도로 긴장되지는 않았을 텐데, 미국 학생들 앞에서 그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수업 시작 전부터 나를 한없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혹시라도 내 발음을 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내가 쓰는 문법의 오류를 비웃지는 않을까...


계속 이런 걱정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강의실까지 걸어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이윽고, 강의가 열리는 건물에 도착했는데, 이 건물은 캠퍼스 내에서도 처음 와보는 위치였다. 건물 구조를 모르다 보니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서 강의실을 찾는 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복도를 한참 돌고 돌다 보니, 마침내 나의 역사적인 첫 수업이 열리는 강의실이 저기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수업을 하게  강의실은  건물 안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강의실까지 마치 다락방에 올라가는 것처럼 좁은 계단을 다시 한번 올라가야 하는 구조였다.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아니어서 내가  걸음씩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대신  계단씩 오를 때마다  심장 박동 소리가 커져갔다. 계단을  올라 강의실  앞에 도착하자, 나는 크게 심호흡을     강의실 문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다.


실제 이 날 내가 올라갔던 계단과 그 끝으로 살짝 보이는 강의실 문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는데... 일단, 실내가 어두컴컴해서 놀랐고, 불이 꺼진 조그만 강의실에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 있어서 한번  놀랐다. 나중에 알게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같으면 제일 먼저  학생이 강의실 조명 스위치를 켰겠지만, 미국 학생들은 강사가 불을 켜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굳이 먼저 불을 켜진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태연하게 강의실  옆의 벽에 붙어있는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강의실에 불이 반짝하고 들어왔고, 그와 거의 동시에 자리에 앉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꽂혔다. 강의실 문으로 들어와 칠판 앞에 있는 강사용 테이블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 수많은 눈동자들이 나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자, 지금부터는 최대한 침착하고 태연하게 행동하자.


마치 주문을 걸듯,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7시 57분. 아직 수업 시작까지는 3분 정도가 남았다. 일단, 강사용 의자에 앉아 미리 챙겨 온 워크시트와 출석부를 가방에서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학생들의 시선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은 채,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워크시트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게 말만 그랬다. 아무리 노력해도, 워크시트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에서  단계  나아가 '하얀 것은 글자. 검은 것은 종이로다'라고 말할 만큼, 머릿속이   느낌이었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던 3분이었다.  3 동안 나는 워크시트를 보는 척하며 잠시  여기 앞에 앉아 있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미리 준비해온 멘트를 마음속으로 연습했다.


드디어 오전 8시 정각.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과 눈을 맞추었다. 순간, 강의실에 앉아 있는 25명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안녕. 내 이름은 토마스라고 해. 앞으로 한 학기 동안 너희들에게 레시테이션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어.
나는 한국에서 왔고, 지금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야. 너희들이 학기 말에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내가 도와줄게.


내가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아이들의 표정은 제 각각이었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호기심을 보이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아무 관심도 없는 듯 무표정하게 내 얼굴을 응시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내 나름대로는 제법 길게 자기소개를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마치고 나니 겨우 30초 정도 지난 기분이 들었다. (다시 말해,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49분 30초가 남았나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간단히 내 소개를 마친 다음, 바통을 학생들에게 넘겼다.


자, 그럼 이제 간단히 너희들 소개를 하면 어떻겠니? 이름이 뭐고, 어디서 왔고, 전공은 뭐고, 관심 사항은 뭔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줄래?


강의실 왼쪽의 제일 앞에 있는 학생부터 한 명씩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부탁한 뒤, 나는 강사용 테이블에 앉아서 학생들의 소개를 듣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한 명당 약 30초씩 잡아서, 약 10분 정도를 학생들의 소개 시간에 할애하고, 그다음에는 실질적으로 40분 동안만 수업을 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맙소사. 내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이 너무 쏜살같이 자기소개를 끝내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안녕, 내 이름은 xxx야. 나는 xxx에서 왔고, 전공은 아직 안 정했어. 나는 운동을 좋아해. (끝)


30초는 고사하고, 약 5초면 끝나버렸다. 결국, 당초 계획했던 '자기소개 시간을 통해 10분 때우기'는 물 건너가고, 거의 3분 만에 후다닥 자기소개는 끝이 났다. (말하자면, 앞으로 수업이 끝나려면 45분이나 남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 학생들의 자기소개를 듣고 나니,  수업의 인적 구성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을   있었다. 우선,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한 1학년이었다. 내가 지금 그런 것처럼, 얘네들도 이곳에   며칠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운 그런 상황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보니, 아직 고등학생 티가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학교의 학부 과정은 백인 비율이 유난히 높다는 사실을 미리 들어서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었지만, 역시나 이 반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한국계 여학생 한 명을 빼고는 전부가 백인이었는데, 그 한국계 여학생도 소개를 들어보니 성(family name)만 한국계일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전형적인 미국 학생이었다. 보통 우리 전공의 학부 수업은 남녀 성비가 7:3 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반의 경우 남녀 성비가 5:5 정도가 될 만큼 여학생들의 비율이 높은 것도 특이 사항이었다.


아무튼, 계획보다 다소 이르게 자기소개 시간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일단, 나는 미리 준비해온 종이를 꺼내서 지난주 수업 시간에 다뤘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칠판에다가 하나하나 쓰며 아이들에게 복습을 해주었다. 확실히 전공과 관련된 용어들이 나오니, 말하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특히나 칠판에다가 글자를 함께 쓰면서 말을 하니 '혹시 아이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많이 줄어들었다. 설명을 하다가, 중간중간 멈추면서 '다 이해했니?' 혹은 '혹시 질문은 없니?'라고 물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다행히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


정신없이 설명을 마친 뒤, 방금 다룬 내용과 관련된 연습 문제들이 들어있는 워크시트를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3~4명 정도 그룹을 만들어서 함께 10분 동안 워크시트를 풀라고 한 뒤,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미리 준비해온 워크시트 풀잇법을 다시 한번 검토했다. (지난번 글에서 말한 것처럼, 이 워크시트는 나와 함께 TA를 하는 제이콥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다행히도 원론 수업이다 보니, 내용 자체가 설명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학생들이 미리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할 경우에 대해서는 항상 대비를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그룹별로 어느 정도 문제 풀이가 끝났는지, 강의실이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 대부분이 신입생들이고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난 사이라서, 문제를 풀고 나서는 함께 수다를 떨만한 이렇다 할 공통 관심사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일어나서 강의실을 돌며 각 그룹별로 앉아 있는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는데, 확실히 처음 수업을 시작했을 때보다 긴장이 많이 풀린 덕분에,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나도 모르게 옅은 (혹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만큼 약간의 여유도 생겼다.


그래, 내가  아이들보다 영어는 못하지만, 적어도 전공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훨씬 앞서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자.  아이들은  영어가 어떤지를 듣기 위해서   아니라, 전공과 관련해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왔고, 내가  일은  아이들에게 최대한 알기 쉽게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신기하게도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세를 몰아, 나는 바로 문제 풀이를 시작했다. 아이들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최대한 천천히 한 문제, 한 문제씩 풀어나갔다. 다행히도 많은 아이들이 내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강의실 칠판 앞에 서서 문제 자체에만 푹 빠져서 무언가를 쉴 새 없이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토록 긴장했던 50분간의 수업이 어느새 끝나 있었다. 아이들에게 다음 주에 보자는 인사를 하고 칠판에 백묵으로 쓴 글자들을 지우개로 지우고 있으니, 몇몇 아이들이 내게 다가와 '오늘 수업 좋았어. 앞으로 잘 부탁해'라고 웃으며 인사를 청했다. 아. 그 순간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강의실 모습 (저 책상에 미국 아이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50분이었지만, 나의  영어 강의는 비교적 만족스러웠다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앞으로 일주일마다 이런 수업을   반복하며한 학기 동안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부담스러웠지만, 적어도  수업만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부디 앞으로 하게 될 강의들도 이렇게 별문제 없이 진행되기를 바라며, 나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강의실을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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