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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14. 2021

행복하면 다냐?

그래, 다다.

30대 후반쯤에 사는 것이 꽤나 힘들어졌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서 불행해지고 말았지요. 아니, 너무 힘드니 어쩔 수 없이 제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행하니 사는 것이 힘들더군요. 그런 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앞으로 뭔가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뭔가 새로운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현실은 힘듦을 넘어서 절망으로 다가왔죠.


그런 상태가 되자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럭저럭 살고 있을 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인데, 그것은 바로 ‘나는 왜 살고 있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욕구였습니다. 당장 힘드니까 적어도 살아야 할 이유 정도는 알아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요.


사는 이유가 많이 궁금해졌습니다. 사는 이유가 궁금하니 삶 그 자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목적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물론 죽음 이후도 알고 싶었지요.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을 걸으며 그것들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분석하고, 통합하고, 이해했습니다. 그 과정을 거쳐서 삶에 대해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를 하려고 애썼지요.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바로 ‘과학’입니다. 생물학, 물리학, 우주 등등 수많은 종류의 자연과학 서적들을 읽었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서적들을 볼 능력은 되질 않아서 주로 교양과학 수준으로 나온 책들을 보았지요. 그다음으로 철학, 역사, 심리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종교로 마무리가 되었죠.


중간중간에 나온 결론들을 계속 글로 옮겼습니다. 비록 한 걸음씩이지만 수년간의 시간 동안 천천히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7년 정도 쓴 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그 과정이 끝나고 나자 제 눈을 가려왔던 희뿌연 했던 안개가 걷히면서 삶에 관한 진실이 제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실망스럽게도 제가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은 없더군요. 제가 그동안 믿어왔고, 바라기도 했던 것과는 달리 저는 처음부터 어떤 의미나 목적을 지닐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였죠. 원하던 답은 얻었지만 꽤나 우울한 결론이었습니다.


단지 종교만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그리고 이후 이어질 수 있는 영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한 가지 희망은 남아 있는 셈이지요.


그런 시간들은 좋게 말하면 나를 알아가는 진지한 시간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한없이 어딘가로 침전되어서 고립되는 삶이었습니다. 지식을 쌓고 삶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좋았지만, 그럴수록 그 본질을 드러내는 삶의 무의미성이 저를 힘들게 했지요.


그런 저와는 달리 아내는 그야말로 본능적인 삶을 살아가고 사람입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죠. 가끔 보면 너무 아무런 생각이 없이 사는 듯 보이기도 해서 부럽다가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좋지 않은 일들로 인해 한없이 우울했던 저는, 그런 것들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아내의 무심함에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행복하면 다냐?”


그 순간 아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지금은 그 얘기를 하면서 저를 비웃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 이외엔 딱히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던 아내가 제 비난에 딱히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질문을 하고 난 후 한참이 지난 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아내에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질문을 아내에게 한 이유는, 부끄럽지만 아내의 행복을 질투한 것이었죠.


삶은 행복한 것이 다였습니다. 단지 그 행복의 종류가 사람마다 너무도 다양해서 가끔은 그것이 행복이 아닌 것처럼 보일 뿐이었죠.



저는 그제야 제가 왜 ‘왜 사는지’를 궁금해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불행하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그 자체가 저를 행복하게 했으니까 그렇게 매달린 것입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충분히 행복해지면 왜 사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혹은 아는 과정이 행복하면 계속 알려고 노력할 뿐이죠. 그 순간 저와 달리 왜 사는지가 전혀 궁금하지도, 제가 읽는 책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아내가 비로소 이해가 갔습니다.




저도 아내처럼 행복해지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랜 고립에서 벗어나 수영장을 등록해 사람들과 어울리고 독서 모임에 나가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제가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관계’가 거기에 있었으니까요.


처음엔 좋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가진 본질적 문제점들이 보였습니다. 다들 자신이 누려야 할 것들에 대한 당연함과,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억울함으로 인해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들은 이미 모두 당연해졌고, 갖지 못한 것들은 불만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제 자신의 존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그 우울한 진실을 알고 있던 저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오히려 자신에게 과도한 의미와 가치부여를 통해 생겨나는, 행복에 대한 권리의식과 가진 것들에 대한 당연함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한 현상이지만, 자신을 어떤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믿으면 믿을수록, 자신은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고 믿을수록 오히려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몹시 화가 나고, 단지 행복하지 않은데 그것을 불행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점에 있는 많은 책들은 거꾸로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더 가치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너는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위로의 말들은 당장 듣기는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다들 높이 올라가기만을 원하니 비우고 내려와야 행복할 수 있다는 제 말이 거의 들어가지 않더군요. 진짜로 행복하고 싶다면 당연함을 줄이고 감사함을 늘려야 한다고 설명해줘도 그 순간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꼈지만 당장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후 제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또 어떤 것을 더 알고 이해하게 될지. 단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이를 먹은 삶이 훨씬 더 나아질 것이란 점을 말이죠. 제가 저를 비워내면 비워낼수록 저는 그 안에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습니다. 비운만큼 제 안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죠. 거기에 사람들에 대한 더 많은 이해와 사랑이 쌓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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