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Jul 26. 2021

먹기 위해 산다 #9

나에게 빠진 것들

“저는 가끔 불안함을 느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가 딱히 큰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뭐, 그나마 문제가 될만한 것들은, 일단 직장의 미래가 좀 불안하긴 해요. 그리고 아직 괜찮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결혼도 안 했고요. 아! 그렇다고 해서 제가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하게 되면 하는 것이죠. 그래도 가끔 여행을 다녀오면 불안함이 많이 줄어들어요. 만약 여행을 하기 힘든 상황이면 서점에 가서 책을 골라 읽기도 해요. 그러면 어느 정도는 불안함에서 벗어나게 되죠. 그런데도 문득문득 불안함이 되돌아오네요. 저는 일종의 불안장애인 가요? 도대체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다. 전혀 불안장애가 아니다. 실제로 현실이 불안하다. 단지 그 불안함의 원인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왜 불안한 것일까? 찾기 어렵지도 않다.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늙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그렇게 늙었을 때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이다. 노후가 걱정이란 뜻이다.


노후 걱정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하나는 경제적 문제, 둘은 아플 때의 문제, 셋은 외로움의 문제이다. 이 셋은 가능하다면 해결하는 편이 좋은데, 직장이 불안하고, 믿을만한 배우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이 세 가지 문제는 모두 발생할 상황이 높다.


그러니 당장 불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삶이 아직 두려움의 단계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 해결책으로 쓰는 방법이 여행과 책이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닌 지루함의 해결책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잘못된 해결책을 적용한다. 두려움을 해결해야 하는데 지루함을 해결하고 있고, 지루함을 해결해야 하는데 두려움을 해결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적용이 사람들이 불행하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이다.


지금 팔자 좋게 여행 떠나고 책을 볼 때가 아니다. 해도 되긴 하지만 그것보다 어떤 노력을 해서든 충분히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노후를 함께 보낼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좋다. 혼자 살면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둘인 아프거나 외로움의 문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영혼의 친구를 구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지금 당장 그런 존재에 대한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이다. 온라인 상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엮여 있거나, 늙어가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관계들은 다 떨어져 나갈 것이고, 부모님은 결국엔 돌아가시게 된다. 그 사실을 당신의 의식은 부정해도 영리한 당신의 무의식이 알고 있다.


두려움을 외면하지 말아라. 그것은 오직 직시가 될 때 처리가 된다. 꼭 해결될 필요도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요. 남들은 이것저것 재미있게 잘도 하고 다니는데, 저는 무엇을 해도 그리 재미있지도 않고 흥미도 안 생기네요. 어떨 때는 아무런 의욕이 없고 우울하기까지 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삶이 이미 두려움의 단계에서 지루함의 단계로 넘어왔는데 여전히 두려움의 해결책을 적용하고 있다. 그렇게 잘못된 적용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가 없다. 지루함을 해결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과거처럼 똑같이 해야 할 일에 집착하고 있다.


가끔 용기를 내서 두려움의 단계에서 벗어나 막상 남들처럼 지루함을 해결하는 방법을 흉내 내봐도 뭔가 좀 이상하다. 특히 돈이 많이 아깝다. 해외여행 한번 떠나자니 일 년 생활비가 깨진다. 겨우겨우 떠나도 여행지에서 돈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서 통장의 잔고가 떠돈다. 그렇게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자신이 사놓고도 왜 샀는지 모를 기념품들과 줄어든 통장 잔고만 남아 있다.


두려움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돈을 모을 때 행복하고, 지루함의 단계에 있는 사람은 돈을 쓸 때 행복하다. 그런데 이미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고정적이라서 지루함의 해결책으로 넘어야 할 상황인데 머릿속은 여전히 두려움의 해결책만 찾고 있다. 그러니 여행의 행복보다 돈이 줄어드는 불안함이 더 크다. 돈이 늘어날 때만 행복하니 돈이 줄어들 때 불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냐고? 어렵지 않다. 궁상맞게 살지 않으면 된다. 사치와 낭비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절제는 하되 쓰기로 일단 마음먹었다면 마음 편하게 충분히 써야 한다.


마트에 가서 세일 상품만 골라서 사지 말고, 그날 먹고 싶은 것을 사서 먹어라. 꽤나 비싸도 괜찮다. 매일 그런 욕구를 느낄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정도 돈은 있지 않은가? 음식점에 가서 제일 싼 음식을 시키지 말고 옆에서 먹고 있어서 괜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을 시켜라. 


제품을 살 때 그 가격이 아닌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돈으로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사는 것이다. 


두려움의 소비는 수세미나 화장지와 같은 생필품을 사는 것이다. 그것들은 두려움 단계의 소비이다.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서 반드시 사야 하고, 가능하면 싸게 사는 것이 좋다.


지루함의 소비는 행복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사고 싶은 것을 사야 하고 어느 정도 비싸도 괜찮다. 살 때 예뻐서 기분이 좋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고, 쓸 때 기분이 좋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가격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 굶어 죽을 수 있는, 두려움의 단계이다. 지루함의 단계에 올라서면 가격이 아닌 제품의 성능과 완성도 특히 예쁜 디자인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충분히 만족스럽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지갑을 열면 된다.



과거 두려움의 시대는 ‘살기 위해서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루함의 시대이다. 그래서 요즘엔 먹고사는 일이 걱정인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맛난 것을 먹지 못할까 봐 걱정인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먹기 위해서 산다’. 이 말은 우리가 이제 두려움이 아닌 지루함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언하는 명백한 표현이다.




“매일 신나게 놀아요. 영화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게임도 하고, 취미로 캠핑도 해요. 그런데 가끔 뭔가 좀 공허한 느낌이 들어요. 삶이 헛도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다가 가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삶에 관한 깊은 대사가 나오면 뭔가가 끌려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히고 말죠. 큰 문제는 없는데 왜 그렇게 가끔 그럴까요? 제가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큰 문제는 없다. 단지 지루함을 온통 ‘시간을 때우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괜찮은 방식이지만, 너무 그렇게만 처리해버리면 해결되지 못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지루함의 요구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서 결국 차곡차곡 내면에 쌓이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가끔 느껴지는 공허함의 정체이다.


최소한 한 가지 정도, 사회 통념상 ‘쌓이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을 해야 한다. 열심히 운동을 하든지, 책을 보든지, 글을 쓰든지, 미술이나 음악을 배우는 것이 좋다. 좀 더 특이한 것을 하면 더 좋다. 텃밭을 가꾸는 것이나, 별을 보는 것이나, 도자기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다.


누군가에게 얘기하면 부럽다든가 아니면 ‘당신이 그런 취미가 있었는지 몰랐네?’라는 표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해라. 단지 그것을 하고 있다고 남들에게 떠들지 말아라. 그것들은 숨겨져 있을 때 진정한 힘을 갖는다.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어떤 것, 그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히든카드이며, 플러스 알파이다.


남에게 알려진 것들은 이미 당신과 일체화가 되어서 고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래를 대비해서 준비해 놓은 것'이 될 수 없다. 이미 고정된 것들로는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달 받는 월급은 아무런 감흥이 없지만, 우연히 얻게 된 십만 원이 비록 액수는 적어도 우리를 훨씬 더 기분 좋게 해주는 이유이다.

작가의 이전글 먹기 위해 산다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