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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l 27. 2021

먹기 위해 산다 #끝

나는 초식동물이 아니다


“매일 열심히 살아요. 10년 동안 책 천 권 읽기를 실천 중이고, 일 년 동안 매일 글쓰기를 도전하고 있죠. 매일 운동도 열심히 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끝없이 새로운 정보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 하루가 금방 지나가고 일 년이 금세 흘러가죠. 그것이 좋긴 좋은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꼭 행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하지만 또 이런 생각도 들어요. 행복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사실 행복은 어떤 면에서 그냥 사람들의 관념이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 행복은 관념이 아니다. 행복은 밝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처럼 확실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단지 어떤 이유로 인해서 그것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행복하지는 않은 것일까?


과해서 그렇다. 여유로 남은 시간을 온통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데’ 다 쓰고 있어서 그렇다. 가끔은 그저 단순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 너무 진지하게 미래를 대비하고 있다.


만약 지금의 노력이 반드시 미래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런 노력은 매우 중요하고 하는 동안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력들이 미래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확신은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 대부분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믿거나,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기에 하고 있을 뿐이다.


미래에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모든 것을 미래를 위해 ‘올인’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혹시나 상대의 패가 자신의 것보다 더 높으면 도대체 그 결과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시간이 남을 때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니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현재를 좀 더 즐겁게 보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일단 놀아야 한다. 사람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재미난 영화도 보는 것이 좋다. 놀이공원에 가서 신나게 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 보라.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뜨거운 여름에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제일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 ‘그래, 이것이 인생이지’라고 생각해 봐라.

가치 있어 보이는 일만 하려고 하지 말고 때로는 즐거운 일도 해라. 


‘아끼면 똥 된다’라는 말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것이다. 현재를 아껴서 미래를 위해 쓰지만, 그 미래는 매 순간 현재가 되고 있으며, 그렇게 현재가 된 미래 또한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아껴질 뿐이다. 그렇게 살다가 도대체 언제쯤이나 내가 올인했던 ‘미래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결국 그렇다가 죽음 앞에 설뿐이다.




현시대는 두려움의 시대가 아니라 지루함의 시대이다.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하는 행복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복을 추구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고 믿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플랭크(Viktor Emil Frankl)는 이 시대를 권태의 시대, 그러니까 지루함의 시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여가시간이 더 많아지는 미래로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지루함 속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때 지루함을 해결하는 방법을 스스로 결정을 하질 못하게 되면 결국 존재적 공허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찾지 못하게 되면 존재적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다들 이미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했을까? 억지로 여행 가고, 억지로 영화 보고, 억지로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 다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싶어서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어서 그렇다. 라캉(Jacques Lacan)의 표현처럼 사람들 대부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각자 가지고 있는 하고 싶은 일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유명한 맛집에 가고,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읽고, 연예인이 걸치고 나온 옷과 장신구를 따라서 하고 있다. 기업이 ‘당신의 품격을 높여줍니다’라고 광고하는 차를 타고, 친구가 좋다고 말한 장소로 여행을 가고, 회사 동료가 갔다 왔다는 놀이공원에 간다.


우리의 선택엔 늘 다른 이들의 선택이 선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의 선택엔 또 다른 이들의 선택이 선행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 시작점이 어디일까? 거기엔 우리의 상상 이상보다 훨씬 더 많은 기업의 광고나 남몰래 협찬을 받은 블로거, 유튜버들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그중에서 정말로 좋았던 곳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많은 것들이 그저 ‘괜찮은’ 수준이다.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기에 그렇다. 유행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는 순간부터 그것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로 바뀐다. 남들이 여행을 가니 나도 여행을 가야 하고, 남들이 읽으니 나도 읽어야 할 것 같다. 남들이 먹으면 나도 먹어야 할 것 같고, 남들이 사니 나도 사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인생에 있어서 꼭 해야 할 일 100가지'가 만들어진다.


초식동물들이 포식자로부터 도망칠 때는 한 방향으로 뛴다. 만약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가는 잡아 먹히기 십상이다. 이것이 바로 유행의 정체이다. 우리가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 유행을 따르는 이유가 바로 눈에 띄면 죽었던 과거의 습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두려움의 시대의 생존 방법이었다.


세렝게티 평원의 누 떼


지금은 지루함의 시대이다. 그래서 개성의 시대이다. 얼마나 주변과 같아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눈에 띄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유행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남들을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지루함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두려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남들과 다르면 뒤쳐진다고 느낀다.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느끼며 불안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재빨리 남들과 같은 모습이 되길 바란다. 결국 타자의 욕망이 내 것이 되고 만다. 그렇게 나이를 먹을수록 존재적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제는 이 흐름에서 한걸음 벗어나 보자. 유행이 아닌 개성을, 두려움이 아닌 지루함을 해결하면서 살아보자. 내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일들 중에서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혼자서 무인도에 살고 있더라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싶은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리고 생각보다 혼란스럽겠지만, 분명히 답은 존재한다. 단지 지금껏 그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이젠 과거의 구습을 끊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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