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Aug 08. 2021

내 감정은 죄가 없다 #끝

선택의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면 무서워서 울면 된다. 작은 두려움을 느꼈다면 퍼서 울면 된다. 우리가 어렸을  느꼈던 불행의 감정은   가지뿐이었다. 하지만 어른으로 정의된 후부터 우리는 무서워서 울면  되게 되었고, 슬퍼서 우는 것도 앞에 있는 사람을 가려야 했다.


자신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내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이며, 약자라는 것이며, 남들에게 쉽게 이용당할 수 있는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들 ‘어른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내가 어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도, 두려움을 분노나 짜증으로 변형시켜 설명한다고 해도,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작고 가여운 아이가 있다. 우리가 평소엔 그 아이를 부끄럽게 여기며 ‘약하다는’ 이유로 바라봐 주질 않고 있을 뿐이다.


그 아이는 삶의 무게에 몰리다 못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그제야 나타난다. 그래서 아무리 강해 보이던 사람도 몰릴 대로 몰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 두려움에 울고, 슬픔에 울게 된다. 강해 보이던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광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누군가 드러낸 약함은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깊은 공감이 된다. 심지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조차 그렇다. 너도 가지고 있고, 나도 가지고 있는, 그 두 아이가 서로 만나 서로를 안아주고 있는 것이다. 너도 무섭고, 나도 무섭다. 너도 슬프고, 나도 슬프다.


그것이 치유이다.


하지만 우린 너무 오랫동안 그 아이를 부정해왔다. 혹시나 가끔 나타나게 되면 ‘내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함을 들킬까 봐’, ‘나를 약자로 볼까 봐’, ‘혹시나 이용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재빠르게 숨기려고 했다. 그러고 나서 그 아이를 크게 혼냈다. 왜 함부로 나오냐고 꾸짖었다.


그로 인해서 불행은 증폭되었고, 그냥 두면 사라질 감정들이 끝없이 내 안에서 흐르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딱히 큰 문제도 없지만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운이 없다면 불행해지기까지 했다.


이제 좀 멈춰보자. 내가 무섭고 슬픈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저 내가 인간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처음부터 내 감정은 아무런 죄가 없다. 그것은 그저 내가 약한 존재라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스스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드러낸 약함은 그토록 잘 공감해주면서 자신의 약함은 왜 그렇게 공감해주지 못할까?

왜 그렇게 평생 동안 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두려워서 나도 미워하고, 남도 미워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는 그저 내 안에 있는 아이가 느끼는 감정들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서 그것들을 어느 정도 부드럽게 표현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런 감정들이 생겨나는 것 자체를 부정하거나, 이미 생겨난 감정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결국 자기부정이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만들어 낸 괴물이다.


사실 우리가 정말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해왔고, 실제적으로도 확실한 방법이다.


내가 아닌 우리로써 사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이토록 찬란한 문명을 세운 것은 내가 강하고 잘나서가 아니다. 다 같이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잘나고 싶다는 이유로 인해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 감정을 꾸짖고, 타인의 감정을 비웃는다.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감정은 그 즉시 변형시켜서 사실과 논리로 그 정당성을 얻으려고 하지만 정작 우리가 얻는 것은 더 커져버린 갈등이다.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나와 너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


결국 나는 너무도 강해지고 싶어서, 너무도 약해지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강해지고 싶다면 잃어버린 어울림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울림은 해결책으로써는 최고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된 해결책으로 쓰기가 아주 어렵다. 매우 좋은 약이지만, 그 약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도 어렵다. 조금만 잘못해도 약이 아니라 독이 되고 만다.


분명히 지금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우리는 이제 진정한 자유의지는 주어진 결과를 내가 더 행복한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내가 이타적인 존재라고 착각해서 상처를 받고 또한 상처를 주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근원이 두려움과 지루함이며, 그것들을 제대로 처리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안에 작고 여린 존재가 있음을, 그래서 그 아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이 진정한 나로 되돌아가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지만, 이것들은 ‘나와 다르지 않은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과정도 된다. 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남을 더 이해하면 할수록 그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두 번째로 ‘인간관계’를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나름대로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 우리는 적어도 이젠 과거 학창 시절 서투르고 조바심에 가득 찬 그런 풋내기가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상처를 입고 성숙해질 기회를 얻었었지만, 그것들은 이제 모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는 할 수 있다. 그러니 두 번째 기회는 분명히 올 것이다.


이제 오직 당신의 선택만 남았다. 당신은 지금껏 살아왔듯 여전히 어른 흉내를 내면서 홀로 강하고 잘난 존재가 되길 바라면서 살든가, 아니면 나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명하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내 약함을 끝없이 꾸짖고 타인의 약함을 비난하며 살든가, 내 약함을 감싸주고, 타인의 약함을 넓은 품으로 안아줄 수 있다. 내 약함을 숨기고 드러난 타인의 약함을 혐오하며 살든가, 내 약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약함도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지금부터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작가의 이전글 내 감정은 죄가 없다 #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