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실래요?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제일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는 참 희한한 놈이다. 감정이 생기면 생긴 거지, 왜 생겼는지가 왜 그렇게 궁금해?”
한참 사춘기 시절이라 화, 열등감, 질투, 조바심과 같은 나쁜 감정들이 생길 때마다 ‘내 감정이 왜 생겼는지 궁금해하던’ 저에게 친구가 툭 던진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남들은 나처럼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 왜 생겼는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지금도 딱히 명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저는 그게 그렇게 궁금했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인 이유는 ‘그런 감정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라는 제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겠죠. 당시엔 제 감정을 제 생각에 따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 부작용이 생기더군요. 내 감정의 원인을 분석하다가 보니 대충 그 이유는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의 감정들도 유추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안의 무의식에 숨겨져 있는 진짜 의도를 파악해내는 재주가 생긴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요?
인간 혐오가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그 누구라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 말이 다 들리는 능력이 생기면 저랑 비슷해질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어쭙잖게 사람들의 숨겨진 심리를 분석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비판적 짝퉁 심리분석가가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이 모이는 대학교에서는 당연히 열등감과 질투심을 느낄 기회가 더 늘었죠. 때문에 저는 제대로 맞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의 부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재주를 급격히 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주변의 사람들의 행동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면을 발견해 내는 것에 나름대로의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장점과 단점 중에서 단점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비난하는 일이었기에 이것에 찬성하는 사람들도 좀 있었습니다. 그렇게 무리를 지은 저는 끝없이 세상에 대한 비난과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저를 가득 채운 채 살아갔습니다.
군대에 가니 그 증상이 더욱 심각해지더군요. 그야말로 인간 군상이 다 모여드는 군대라는 조직엔, 제가 평생 동안 만나기 힘든 유형의 인간들이 즐비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제 먹잇감들이 정말로 많았다는 뜻이지요.
군대에서 제대를 한 후 저는 어느 정도 인간 회의론자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던 저로써는 아주 곤란한 상황이었죠.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상대가 조금만 기준점에 미달한다 싶으면 혐오감을 느끼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후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워낙 사람을 가리다 보니 제 곁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긴 했어도 운 좋게 꾸준히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어느 정도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단지 늘 입에서 가시 돋친 말들이 나와서 주변 사람들이 저를 좀 불편해했죠.
삼십 대 후반이 되면서 삶이 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두려워졌죠. 그 전엔 적어도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젠 먹고사는 일이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커진 저는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서 그때부터는 아예 본격적으로 글을 써서 세상과 사람들의 단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은 제가 갖지 못하는 것 투성이니 문제가 많아야 했죠.
제가 세상에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문제가 많은 세상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 세상은 그리고 이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다 문제 투성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따지고 들면 문제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한참 신나게 몇 년간 글을 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쓴 내용이 다 내 얘기구나’. 그렇습니다. 제가 몇 년간 신나서 써온 글들이 모두 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것들이 제 안에 없으면 처음부터 제가 어떻게 그것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앞을 못 보는 사람은 무지개를 설명하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오직 두 눈으로 무지개를 볼 수 있었던 사람만이 무지개를 설명할 수 있지요. 제가 설명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단점이 다 제 안에 있었기에 제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저는 제 안에 있던 그런 면이 나타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제가 혐오하던 그 모든 것이 다 제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비겁하고, 소심하고, 질투심을 느끼고, 열등감과 우월감을 느끼고, 이기적이었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제가 불쌍했습니다.
남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상대에 대한 비난과 혐오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해와 연민이 생겨납니다. 내가 불쌍해지며 남도 불쌍해집니다. 너도 안됐고 나도 안됐습니다.
‘네가 가진 연민의 대상에 너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연민이다’
그때부터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짓을 그만 하기로 했습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것은 결국 제가 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남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할 수는 있지만, 제 스스로 저를 그렇게 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에게 저는 그리 소중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저는 제가 정말로 소중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짓을 당연히 그만둬야죠.
지금도 여전히 저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단점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이니까요.
매일 제 안에 있는 두꺼운 벽들이 조금씩 허물어져 나감을 느낍니다. 도대체 얼마나 두꺼운 지 모르기에 언제쯤이나 다 떨어져서 완전히 사라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믿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길을 동행할 분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