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와아싸의최후
한 달 전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구순의 나이이시기도 했고, 세상과의 이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분들이 편히 떠날 수 있도록 해주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다가 편히 떠나셨기 때문에 그리 뜻밖의 이별은 아니었죠. 더군다나 평소에 저와는 꽤나 데면데면했던 사이인지라 그리 큰 감정 요동 없이 장례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절차를 다 마무리한 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더군요. 좀 이상했습니다. 딱히 시아버지와 돈독한 정이 있던 관계도 아니었으니까요.
왜 우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자신이 딱히 연락할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몇몇 회사 사람들이 코로나를 뚫고 조문을 왔고 온라인 계좌로 조의금이 들어오긴 했지만, 모두 다 회사 사람들뿐이었죠.
아내의 입장에서 그들은 그저 ‘그 시기에 우연히 회사를 같이 다니고 있는 동료’였습니다. 조문을 와 준 것은 고맙지만, 회사를 그만두면 딱히 연락하고 지낼 사이도 아니었고,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드는 분들도 아니었던 것이죠.
저는 아내와 달리 조금이라도 연락할 친구들이 있긴 합니다. 아내는 그런 저의 모습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갑자기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이었죠.
아내는 형제자매 하나 없는 무남독녀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겐 아이가 없습니다. 아내에게 있어서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존재는 부모님 두 분, 그리고 남편인 제가 전부이지요. 물론 부모님의 친척들과 사촌들이 있긴 하지만 외가나 친가가 그리 친하게 지내질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아내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아내는 타고난 ‘인싸’입니다. 저는 반대로 ‘아싸’죠. 아내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본인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몇몇을 빼고는 그 누구와도 허물없이 친하게 지냅니다. 심지어 회사 경영진 하고도 그렇게 지냅니다. 과거에 회사를 다닐 당시 회사 사람 절반 이상이 화장실에 가던 중 복도에서 만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던 저와는 많이 비교되지요.
그런데 지금 아내가 그랬던 저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초등학교를 다닐 때 읽은 글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단체 연주회를 하는 교내 모임에서 북을 치는 아이가 가진 고민을 다룬 이야기였습니다.
북을 치는 아이는 선생님에게 자신의 ‘존재감 없는 위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연주회는 좁은 무대 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몇 줄로 나누어 자리를 잡아야 하고, 앞 쪽에는 주로 피아노, 바이올린 등, 눈에 띄고 그 역할도 명확한 악기와 연주자들이 배치가 됩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딱히 꼭 있어야 할 필요도 없어 보이고, 누구라도 금방 배워서 연주할 수 있는 큰북과 같은 악기들이 배치가 되지요.
그러다 보니 뒤에 선 아이는 관객석에서는 거의 보이질 않게 됩니다. 분명히 존재하고는 있지만, 존재하는지를 관객들이 잘 모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큰 북 치는 아이의 운명이었던 것이죠. 더군다나 북은 계속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가끔 소리를 내는 역할입니다. 악기도 아싸이고, 역할도 아싸이고, 위치도 아싸였던 것입니다.
아이의 고민을 들은 선생님은 그렇게 말해줍니다. 누구나 다 각자만의 쓸모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위치에 있든지 각자만의 주어진 역할이 있는 것이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아주 그럴듯한 설명’을 해줍니다. 아이는 납득을 하면서 글이 끝납니다.
사실 선생님의 설명은 지금 들어도 웃기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뒤에 서게 된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지만 그 말이 맞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뒤에 서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게 하필이면 나여야 할까요? 나도 남들처럼 앞에 서서 조명을 받고 주목을 받고 싶습니다.
사실 어쩔 수 없이 뒤에 있게 되면 진짜로 얻게 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앞에서 관객석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뒤를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밝음 속에 있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죠. 반대로 뒤쪽에서 어둠 속에 잠겨 숨어있는 사람은 밝은 앞 쪽에 있는 사람을 관찰하기가 매우 쉽습니다. 더해서 뒤에서 북을 칠 때는 그리 집중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죠.
뒤에 서서 전체를 바라보면서 가끔 생각에 잠기는 것, 이것은 바로 삶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더해서 몇 가지 얻는 것이 더 있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우연히 맺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지키려고 하죠. 또한 자신과 같이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닥에 깔려 본 사람들만이 바닥에 깔린 사람들을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죠.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피아노를 치던 아이는 커다란 존재감과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뒤에서 큰 북을 치던 아이는 인연의 소중함과 잊힌 자에 대한 진정한 공감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앞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밝은 성격이 주는 장점으로 인해서 누구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서 아내는 특정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이 불가능했고, 과거 한 친구가 ‘교환 일기’를 쓰자고 했을 때 매우 부담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도망쳤죠.
반대로 저는 뒤에서 어둠 속에서 북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긴 하지만 딱히 가진 매력이 없어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죠. 남자라서 ‘교환 일기’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아무튼 언제나 ‘진정한 친구’를 사귀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관계에 집착했고 아내는 떠난 사람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말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둘 다 실패를 했습니다.
하나는 본드를 바른 듯 집착을 하고 하나는 기름을 발라 놓은 듯 미끄러지니 성공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저는 그 집착의 결과로 인해 큰일을 당했을 때 연락할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관계는 사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없으면 딱히 만나지 않는, 그야말로 경조사의 친구들입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자신에게 일어 난 슬픈 일을 전할 단 한 사람조차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 나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삶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게 된 후 관계에 있어서 실패를 인정하게 된 저와 아내는 요즘 새롭게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노력 중입니다. 달라붙지도 않고 미끄럽지도 않은, 그런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지요.
저는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집착만 빼는 수준이라면, 아내는 인생에 있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내는 무려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아마도 아내는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다들 관계를 원하지만 관계가 가진 진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시도를 했다가 결국 실망을 하는 일이 잦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나 아내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엔가는 그저 기회가 없어서 피어나지 못한 꽃의 씨앗과 같은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저희가 부족하지만 적절한 흙과 물을 제공해준다면 언제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분들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 따뜻한 차 한잔을 하는 그날을 꿈꿉니다.
오늘은 가을을 부르는 비가 오고 있네요. 이제 제법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이런 날엔 누군가가 직접 쓴 안부 편지를 받아보고도 싶네요. 뜬금없이 안부 편지를 보내도 좋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