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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Aug 20. 2021

너는 내 운명의 껌딱지 #1

너는 왜 나처럼 못하니?


남자 1: 내가 문제 하나 낼게.

남자 2: 내봐.

남자 1: 한 사람이 어딘가에서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갔어. 거기에서 북쪽으로 이동했더니 처음 출발한 곳으로 돌아왔어.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남자 2: 어이없네?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당연히 북극점에 있으니까 그렇지.

남자 1: 틀렸어.

남자 2: 뭐라고? 그럼 답이 뭔데?

남자 1: 그 사람이 길치라서 그래. 

남자 2: 뭐야~ 그럼 그 사람이 여자야?

남자 1: 아니야, 바로 나야. 우리 방금 두 시간에 전에 지나쳤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왔어.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하는 것이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TV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산속에 들어가 홀로 ‘자연인’의 삶을 살면 된다. 보는 입장에서는 엄두가 안 날 수 있지만, 막상 하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은 선택 가능하지 않다. 삶을 살고 싶다면, 적어도 불행해서 스스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먹고 싶지 않다면 단 한 명이라도 만들어 둬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잠들었을 때 믿고 나를 맡길 수 있는 ‘불침번’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명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면 그 조합으로는 남자와 여자가 가장 좋다. 요즘과 같은 시대엔 구태의연한 관념일 수 있지만, 그 조합의 기능성 측면에서 좋다는 뜻이다. 


남자와 여자는 정말로 다른 존재이며, 그 다름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많은 문제들이 있긴 하지만, 그 다름으로 인해 생겨나는 장점도 무척 많다. 집에 칼이 두 자루 있는 것보다는 칼과 가위가 하나씩 있는 편이 좋다. 둘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어떨 땐 칼이, 어떨 땐 가위가 확실히 편하다.


그래서 서로가 가진 마음에 들지 않는 단점 부분만 넘길 수 있다면 여자와 남자의 조합은 모든 관계에서 가장 최고의 조합이 된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부부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부를 ‘아이를 낳기 위한 조합’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부부는 기능성의 조합으로써 훨씬 더 좋다.


하지만 여기엔 꽤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남녀가 서로가 가진 고유한 특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꽤나 힘겹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가장 좋아야 할 관계가 가장 나쁜 관계로 가는 일은 주변에서 흔히 본다. 


이것은 맛있게 먹으려고 잘 끓인 라면 냄비를 들고 오는 도중 뭔가에 걸려 이불에 다 쏟게 되는 상황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데 더해서 너저분한 라면과 국물로 뒤집어쓴 빨래까지 해야 할 상황이다. 그냥 불행한 것보다 행복이 불행으로 된 것이 훨씬 타격이 크다.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더군다나 옆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부부를 보면 더욱더 열불이 난다. 상대방의 아내가, 남편이 하고 있는 ‘부러운 행동’을 보고 있다 보면 내 옆에 있는 인간에게 더욱더 화가 난다. 그러다가 결국 이혼으로 결론이 나기도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


부부가 갈라설 때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연이 있겠지만, 가장 공통적인 문제는 바로 서로가 상대방이 자신과는 아예 다른 존재임을 몰라서 그렇다. 상대가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착각해서 그렇다. 10년을 사귄 연인들 사이에 느낄 수 있는 공감의 갭 차이가 같은 성별을 가진 갓 입사한 신입과 50대 꼰대 부장 사이의 갭의 차이보다 더 크다.


그럼에도 많은 남녀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를 ‘자신과 매우 비슷한’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얻는 것은 ‘도대체 왜 저러지?’라는 의문이다. 여자의 입장에서,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방의 행동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것들 투성이이기 때문이다.


이해의 부족은 갈등이 일으키고, 갈등은 싸움으로 번지고, 싸움은 서로에 대한 미움으로 변했다가 결국 원망으로 쌓이고 만다.


화장실 변기를 사용하는 일부터,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 보여주는 반응, 누군가와 갈등이 생겼을 때 처리하는 모습, 돈에 대한 관념, 친구들에 대한 의리, 첫사랑을 기억하는 마음, 그것을 왜 사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의문, 너무 눈치를 보거나 너무 눈치를 보지 않는 태도, 이해가 안 가는 두려움의 대상, 고마움에 대한 표현 방식 등등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가 여자를, 남자를 잘 안다고 믿는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로 자라지 못했고, 남자로 태어나 남자로 자라지 못했는데 서로를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혹시나 상대방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들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자신의 친한 ‘동성’ 친구를 찾는다. 언제나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이고, 나와 똑같이 상대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다들 똑같은 말을 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결혼은 한 명하고 밖에 못하니 결국 각자가 단 한 명을 통해서만 했던 경험들을 말한다. 그러면 놀랍게도 비슷한 문제점들이 보인다. 비슷하게 화장실에서 문제가 생기고, 비슷하게 지저분하고, 비슷하게 돈을 낭비하고, 비슷하게 게으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문제일까? 당연히 내가 아닌 내 남편, 내 아내가 문제이다.


결국 모든 이해가 가질 않는 문제는 상대방이 가진 근본적 결함으로 결론 난다. ‘여자는…’, ‘남자는…’으로 마무리가 된다. 상대방 성이 가진 고유한 특징은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결격 사유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반드시 뜯어고쳐야 할 대상이 된다.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는 마음엔 썩 들지는 않더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어떻게든 뜯어고쳐서 내 쪽으로 와 나와 겹쳐지게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 된다. 만약 내가 내가 요구했는데 네가 따르지 못하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문제는 온전히 네 탓’이 된다. 


내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말해줬다.


물론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을 평생 욕하고 비난하면서, 결국엔 스스로 불행을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다들 행복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미 안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게 된 상대방을 뜯어고치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주는 것이 낫질 않을까?


그것이 하고 싶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는 인정을 해야 시작이 가능하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정말로 모른다. 지금껏 딱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알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당장은 비난이 훨씬 쉬웠으니까. 


이제 좀 변화가 필요하다. 욕하고 비난을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알고 난 후에도 또다시 욕을 하면서 끝날 수는 있지만, ‘행복하고 싶다면’ 적어도 한 번쯤은 노력해보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


어찌 아는가? 그동안 너무 짜증 나던 사람이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되면 어떠면 불쌍하게 보이면서 도저히 생길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연민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 기회를 처음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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