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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Oct 31. 2021

완벽한 인생 #9

중간의 불행

“형사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형사님은 언제 시간이 제일 잘 가나요?”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형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시간이요? 흠…” 그는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 얼굴에 답답함이 드러났다. 그럴 것이다. 사실 알고 나면 쉬운 질문이지만 평소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 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나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그가 스스로 답을 찾기를 기다렸다. 답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 똑같이 모르더라도 생각하고 듣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듣는 것은 전혀 다르다.


“힌트를 하나 드리죠.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시간이 제일 빨리 가는지 생각해 보면 될 것이에요.” 한참을 기다린 후 작은 힌트를 하나 줬다. 그러자 조형사는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에서 그것이 드러났다. 


“아! 그러네. 영화 볼 때,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실 때, 게임할 때, 그리고 또 뭐 있더라… 아무튼 재미난 일을 할 때 시간이 잘 가는구나.”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제대로 된 답이다. 사람은 원래 행복한 일을 할 때 시간이 잘 간다. 다르게 말하면 시간의 흐름을 잊으면 잊을수록 우리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이고, 극단적으로 시간을 잊은 순간을 몰입이라는 단어로 따로 칭한다.


“맞는 말입니다. 그럼 반대로 시간이 제일 안 갈 때는 언제죠?” 이번 질문은 좀 쉬울 것이다. 그 반대만 찾으면 되니까. 그리고 평소에도 아주 많이 경험하니까. 역시나 형사는 이전 질문과 달리 질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대답을 했다.


“당연히 일할 때죠. 특히 사무실에서 서류 작성할 때 시간이 제일 안 갑니다. 차라리 현장에서 범인 쫓을 때는 하루가 훌쩍 가는데, 사무실에서 컴퓨터 앞에 있을 때는 한참을 일하다가 시계를 봐도 겨우 10분 지나있어요.” 조형사는 말하면서 웃었다. 좋은 징조이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반응은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앞에 있는 이 형사가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점은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중요했다.


“그것 말고도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주 힘든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시간이 잘 안 가죠. 플랭크 운동을 하고 있는 순간이나, 한 20kg짜리 역기를 어깨에 메고 스쿼드 운동을 하고 있을 때도 일초, 일초가 잘 안 갑니다.” 나는 내 경험을 살려서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자 조형사도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었음을, 지금도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러면서 경찰이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평생 몸 관리를 해야 하며, 주기적으로 체력 테스트를 하며, 자신은 늘 상위권이라는 묻지도 않은 말에 은근한 자기 자랑까지 덧붙였다. 말하는 동안 그는 신나 보였다.


“정리하면, 우리는 즐겁고 행복할 때는 시간이 잘 가고, 반대로 힘들고 불행할 때는 시간이 잘 안 간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내 말에 조형사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런데 이것이 아까 내가 한 질문과 무슨 상관이죠?” 역시 형사는 형사인가 보다. 그는 내 이야기에 흥미는 느끼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빠져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빠져들게 될 것이다. 예전의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나처럼.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즐겁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을 때 시간은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평균적으로 흐르겠네요?” 내 질문에 조형사는 별 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당연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들어도 그럴 것이다. 매우 상식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한 가지 함정이 숨겨져 있다.


“그럼 집에서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도 천천히 흐르지도 않고, 당연히 행복하지도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겠지요? 그러니 집에서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계의 초침이 가는 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은 평균적인 속도로 흘러가겠네요?” 조형사는 곧바로 그렇다고 말을 하려는 듯하다가 잠시 멈췄다. 맞는 말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뭔가 찜찜할 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 혼자 하루 종일 시계의 초침만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흘러간다? 말도 안 된다.


“그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상상을 해보니 그럴 것 같지가 않군요. 이상하네. 만약 내가 그렇고 있으면 꽤나 지루할 것 같은데요. 지루하다는 것은 당연히 시간이 잘 안 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게 도대체 왜 그러죠?” 조형사는 오히려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어서. 사실 살다가 보면 그렇지 못한 수준의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오늘 이 형사와 만난 것은 분명히 행운에 속한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죠. 좀 이상한 일이죠. 행복과 불행의 중간지점, 즐거움과 고통의 중간지점에 있으면 당연히 시간도 평균적인 속도로 흘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불행할 때와 비슷하게 느리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말씀하셨다시피 지루함 때문에 그렇죠.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럴 때 뭔가를 봅니다.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바라보죠. 아니면 게임을 하거나 결국 졸다가 잠에 들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시간은 곧 뭔가를 하는 시간으로 바뀐 후 소모되고 말죠.” 내 말에 조형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여전히 ‘왜 이런 말을 나에게 하고 있지?’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는 지금부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예상치 못할 것이다.


“당연한 현상이지만 이상하지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왜 중간지점에 있으면 조금 더 나쁜 쪽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자,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게요. 100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이 중에서 몇 등 정도 해야 공부를 잘하는 것이 될까요?” 사람마다 차이는 좀 있겠지만, 대충 비슷한 답이 나오는 질문이다.


“음.. 한 20등 내는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조형사는 대충 내가 생각하는 수준으로 답을 했다. 그렇다. 사람들은 보통 20% 정도 내에는 들어야 잘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하위 20%가 되겠네요?” 상식적인 질문이다. 당연히 100명 중에서 80등에서 100등 사이는 공부를 못하는 것이라고 평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조형사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여전히 내가 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 표정이다.


“그렇다면 50등 정도 하는 학생은 어떤 느낌이 드나요? 그래도 중간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아니면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는 쪽에 속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나요?” 이 역시도 사람들마다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긴 하지만,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못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답이 대부분이다. 조형사 역시도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내 예상대로의 답을 했다.


“비슷한 상황이네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시간이나, 100명 중 50등을 하는 것과 같은 중간에 있는 상태는 왜 중간의 특징이 나타나지 못하고 부정적인 쪽과 비슷한 특징이 나타나게 될까요? 말 그대로 양쪽 끝의 평균 상태여야 하는데.” 조형사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는 듯한 답답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당연했다. 원래 답을 찾기가 무척 어려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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