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1년 후
사고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달려가 바로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내려간 장례식장. 여자는 거기서 며칠을 보냈던지.
그 사이 여자의 남편은 놀이방에 맡겨진, 당시 세 살이었던 작은 아이를 데리고 병원 장례식장으로 왔을 테고, 사고를 냈던 마을버스 운전기사를 만났을 테고, 또 여자의 시부모님께 전화를 했을 테지. 그리고 일곱 살 자식의 장례식 관련 모든 서류와 절차를 챙겼을 테다. 여자는 그 모든 걸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오로지 충격과 슬픔에만 잠겨 있었을 테고, 찾아오시는 분들께 측은지심의 대상으로 보이기만을 소망했을 터.
여자의 몸에서 뼈와 살을 만들어 나온 아이, 그 살은 태우고, 뼈는 가루로 만들어 담은 작은 상자, 여자는 화장터에서 받은 그 유골함을 싣고 분당 차병원에 갔다. 당시 작은 아이의 아토피 검사 예약이 있었다. 그리고 전상이 와의 마지막 여행지이자, 남편 친구가 해병대 관리자로 있는 강화도 분오리 돈대로 갔다.
마련된 나룻배를 타고 전상이 뼈가루를 바다에 뿌렸다. 드라마에서 보던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던 가루는 거짓이었다. 재가 섞였는지 진회색이었고, 거칠었다. 시어머님과 다른 이들이 손을 씻었는데 여자는 안 씻었던 기억. 그리고 사십구재까지 지냈던 장안사에 그 작은 상자를 맡겼다.
매주 한 번, 총 일곱 번 지냈던 사십구재는 외관상으론 떠나는 아이를 위한 의식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남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였다.
강화도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해군 대령이었던 남편 친구가 농담을 해서 같이 웃었단 기억을 여자는 한다. 그 상황에서 그런 농담을 해줬던 그 친구를 여자는 문득 또 고마워한다.
얼마 만에 집으로 갔는지, 햇살이 가득한 아파트 단지가 다른 세상 같았다. 사람들이 여자를 피하는 느낌.
집안 가득 쌓인 은물, 각 종 학습지, 산 같은 육아 서적들. 일주일에 네댓 분이나 오셨던 방문 선생님들의 전화와 쌓인 문자들. 야밤에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여자는 이 모든 것들을 재활용 쓰레기장에 버렸다.
전상이는 아기 때부터 여자의 젖을 잘 못 먹고 설사가 잦았다. 해서 엉덩이도 자주 짓물렀다. 여자는 시댁에서 산후조리를 했었다. 둘째 며느리이자 막내며느리였지만, 집안 첫 손주라며 당신께서 봐주신다는 걸 스스로 착한 며느리인 줄 알았던 여자는 거절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니 젖은 물젖이라며 아기를 뺏어 안으시며 분유를 사다 타 먹이시고, 밥 먹으랄 때 제 때 안 나왔다고 너 좋아서 먹으라는 게 아니라 아기 먹여야 하니 먹이는 거라 하신 시어머님. 아직 모든 게 낯선 여자에겐 그게 그리 서러웠나, 뼈가 시리도록 밤 새 울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덜덜 떨며 울었었다. 그러고도 못 미더우시다며 신혼집에 따라 올라오신 시어머니께 여자는 한 달 동안 밥을 해 올렸었다. 아기는 늘 시어머니 품에 있었다. 그리 아기는 여자의 산후 우울증과 함께 허약하게 컸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아이는 시력이 심하게 차이가나 오른쪽 눈에 안대를 했다. 시력 교정용이라고. 그러고 보니 여자도 오른쪽 눈이 상대적으로 나쁘다. 겨울 저녁에 윗집 아이가 눈이 온다며 같이 나가서 놀자고 해서 놀고 오면, 저 혼자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어디 어디에 좋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읽고, 이것저것 해다 억지로 먹여서 토하기도 잘했다.
첫 아이였고, 처음 엄마였어서,라는 구차한 변명하에, 여자는 아이를 어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이큐 검사를 해서 상위 십 퍼센트라는 것에 우쭐했고,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어도 책을 읽고, 여자와 영어 동화를 서로 번갈아 읽으며 밤에 누워 서로 영어 대사를 외우고, 여자가 일부러 잘못 말하면 아이가 고쳐주고, 이러는 게 엄마 노릇인 줄 알았었다.
유치원 졸업 연극에서 토끼 역을 맡았다며, 엄마, 손을 이리 올리는 게 좋아, 이리 올리는 게 좋아, 화장실까지 쫓아오며 양팔을 이 만큼 올렸다 저만큼 올렸다 하며 물어도 건성으로 대답했던 여자였다.
초등학교 들어가면 엄마한테 얼마나 시달릴지 알고 미리 떠난 거지, 그렇지, 하며 여자는 울었다. 그동안 너무도 무난한 삶을 살았던지, 가족의 죽음은 처음이었던 여자. 아니, 가족의 죽음이란 결혼하고서 남편의 큰 누나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때, 그리고 폐암 수술 후 모셨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는데, 여자는 그땐 그게 슬퍼하는 건 줄 알았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렸단 말, 불구덩이가 가슴을 뚫고 지나갔단 말이 무언지 여자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피가 철철 흐르는 가슴을 더욱 찢어 발기는 사람들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보다 여자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맡을 수 없는 살 내음과 만질 수 없는 살 감촉이었다. 전상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공간에서, 살내를 맡고 싶고, 그 작고 말랐던 몸을 만지고 싶고, 안고 싶었다. 그때마다 여자는 남은 작은 애, 지금의 큰 애를 안았다.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2012년 12월 11일에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탔었다. 11년 전 2001년 12월 11일은 전상이가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제생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던 날.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타기 보름 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여자는 제생병원 응급실로 갔다.
십일 년 전, 보호자 대기실의 창가에 서서 여자의 남편은 사댁에 전화를 걸었었다.
전상이가 죽었대,
떠나기 전 어떻게든 기억할 장소는 다시 가보게 되는 운명이었을까. 딱 11년 더 살고 전상이 떠난 날 여자와 아이들도 비행기를 타고 떠나 온 것도 운명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