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첫 집
여자는 요즘도 그 길을 지날 때면 아득해진다. 하와이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까마득히 높은 야자수들이 길 한가운데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보타니 로드의 중앙분리대.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날 정착 서비스 담당자의 차를 타고 봤던 그 첫 장면이 얼마나 뇌리에 깊숙이 남아 있는지, 그날의 막막함이 13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느껴진다.
정착 서비스를 통해 계약한 집에 들어가려면 2주인가 3주인가를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모텔로 갔었다. 여자의 작은 아이는 첫날 밤, 우리가 왜 여기 이렇게 아빠도 없이 있어야 하냐며 한 시간을 넘게 울었다.
아이들은 동네 어학원에 등록을 해놓아서 월요일부터 다녔다. 한국에서의 습성이 여기선 필요 없음을 그 당시 여자는 알 턱이 없었을 터. 왜 아이들을 그냥 두지 못했을까.
작은 아이 나이가 어려 엄마가 같이 다녀야 해서 여자도 그 비싼 학원에 같이 등록을 했었다. 일주일에 2012년 당시 350불 정도였으니 지금 한국돈으로는 아마 사십만 원쯤 될듯하다.
1월 말이 되면서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여자는 어학원에 두 달 더 다니겠단 욕심을 내었다. 웰링턴에 본사가 있고 오클랜드에는 동쪽에 작은 분점이 있는, 유서 깊은 키위 어학원이었고, 창업한 부부의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으면서 코로나 시국 이전에 문을 닫아 여자는 그의 혜안에 놀라기도 했었다.
여자는 이 어학원에서 당시 인턴을 하던 칠레 청년이 그만두면서 그 자리에 지원해 인턴을 시작했다. 아마도 여자 인생에서 가장 많은 긍정 에너지를 얻었던 시기이지 않았을까.
무튼, 이 어학원 인턴 2년 동안 꿈같은 세월을 보냈다 할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여자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으로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고는 했지만, 반대급부로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좋은 싫든 부부가 떨어져 있음에 따라, 두 집이 유지되면서, 돈이 배로 든다 아니할 수 없었고, 그동안 남편하게 의지했던 부분들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되니, 말도 안 되지만, 여자는 심적으로는 큰 아이에게 의지하며 뉴질랜드 집에서의 큰 남자 역할을 종용도 한 것 같고, 여자의 큰 아이도 모종의 그런 책임감 같은 것을 갖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여자의 남편이 온 후 오히려 아이 같아졌다고 할까.
거실 하나 방 두 개 집에 키위 주인집에 달린 뒷집, 마당 건너 문으로 통하는, 에 살면서 여자는 모종의 의지하는 바도 있었지만, 그리고 안전 면에서 집이 뒤에 숨어 있어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도 있었고, 유학생은 학교존(현지 학생들은 그 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주소지 제한이 있다.)에 안 살아도 된다지만(처음엔 이런 것도 몰랐고), 여자는 큰 애 학교와 작은 애 학교와 너무 떨어진 곳에 집을 얻게 되었다. 유학원에 맡겨 정착서비스를 받아 도착 전 집을 보지 않고 구했고(보면 못 구했겠고), 큰 애 학교를 처음 정한 곳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겼던 탓에 처음 정한 학교 가까이에 집이 있었다.
사십오 년 넘게 방바닥이 따뜻한 집에 살던 여자가 온기 하나 없는 카펫도 안 깔린 집에 들어가니, 버릇대로 맨발로 방바닥을 밟았다간 뼛속까지 한기가 파고들었다. 카펫을 까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국서는 전기레인지 쓰는 게 부럽더니, 뉴질랜드는 전기레인지가 빌린 집에도 기본이라, 외려 집안에 불기 하나 볼 수 없는 심적, 정신적 추위에 시달렸다.
어쨌든 여자는 늘 추웠다. 뉴질랜드 여인들이 보통으로 민소매를 입을 때도 늘 긴팔 옷만 입고 다녔다. 유학원에서 벽난로 있는 집을 좀 비싸더라도 권하더니 그 이유를 이해했다. 또, 차고 있는 집이 좋다더니, 그 이유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바리바리 싸서 부쳤던 쓸데없는 것들이 모두 비를 맞아 곰팡이가 슬었다. 그래도 주세 싼 곳을 구했으니 이년을 두 명 유학생비 내며 버틴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냄새에 민감한 여자에게는 한국 가시는 분께 통째로 물려받은 중고가구에서 나는 냄새, 락스로 몇 번을 닦아도 안 가시는, 에 더욱 우울이 심했던 것 같다.
게다가 섬나라 바람 소리는 어찌나 심란했는지, 보통의 바람도 한국의 폭풍 경보 정도로 느껴졌고,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는 머리에 꽃 꽂고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 요크셔 언덕에 히스클리프가 서 있는 풍경이 연상되면서 에밀리브론테가 괜히 일찍 죽은 게 아니야... 여자는 이러고 있었다.
물론, 여자에겐 마흔다섯 넘어 맞은 첫 서방세계 생활에다가 거의 십팔 년 결혼생활 동안 심각한 남편 의존적 생활을 하다 떨어져 살면서 비루하다 자평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그 우울감은 더 심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여자에게 우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뷰티풀마인드에서 러셀크로우의 존내시 박사가 애드해리스의 패쳐를 친구로 받아들였듯, 평생 친구로 함께 할 존재였다. 비 오는 날 퇴근 하고 여자가 집 앞에 차를 세우곤 울고 앉아있으면 여자의 큰 애가 우산 들고 나와서 집에 안 들어오고 뭐 하냐며 데리고 들어가고는 했었다.
여자는 작은 애가 잠든 밤이면 큰 애와 동네 조깅을 했었는데, 목, 금요일 저녁(주급 받는 날이라 3시에 닫던 쇼핑센터도 9시까지 했던)이면 집집마다 파티를 왁자하게 했더랬다. 여자의 큰 애가 우리한테도 저런 날이 올까 하며 여자와 둘이 울었던 기억도 있다. 성냥팔이 소녀가 문 밖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한 없이 갖고 싶어 하며 바라보는 그 느낌.
그러다 3년 만에 여자가 아이들과 한국에 갔을 때 집안에 계단 있는 오피스텔에 남편이 살고 있길래, 뭐야, 혼자 이리 좋은데 산단말이야, 이러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다. 그때 여자에게 한국 것이 뭔들 좋아 보이지 않았을까. 여자의 남편은 아이들 공간을 생각하며 택한 집이었을 텐데.
그런데 가족 완전체로 살고 있는 지금은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여자는 그렇구나 하고 있다는 것. 그때는 왜 그리 날씨에 민감했을까 싶지만, 그 근본은 불안이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하루에 카톡을 삼천 개나 받았다는 여자의 큰 애. 이 아이는 뉴질랜드 9학년에서 13학년까지의 5년 과정의 고등학교, 즉, 컬리지를 무려 육 년 다니게 된다. 그리고 한국서 올 때 여자의 친구들이 작은 애 보고 가장 좋은 나이에 간다더니, 과연 여자의 작은 애는 한국 초4 나이로 뉴질랜드 초5부터 시작했는데, 뉴질랜드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