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페이스

Coffee-face

by 하이민

커피는 무기가 된다.

적어도 빈 과장에게는 그렇다.


그는 커피를 마시면 성격을 바꿀 수 있다. 이 능력 덕분에 회사생활에 쏠쏠한 재미를 봐왔다. 이번 달엔 과장으로 진급도 했다. 출근길 살랑대는 바람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무채색 세상을 알록달록하게 색칠할 준비를 마치고 그가 걸어갈 꽃길을 마련해주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중요한 거래처 3군데와 연달아 미팅이 있는 날이다. 갑작스레 맡게 된 일이라 업체들과 얼굴도 익히고 계약서 내용을 간단히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침 회의시간 부장이 월말 실적이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건네는 시선에 빈 과장은 냉수를 들이키며 그 시간을 꿀꺽 삼켜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내쉬며 미팅 장소로 잡힌 카페로 향했다. 회사 근처 카페 중에서도 유독 깊고 진한 커피 맛을 자랑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빈 과장이 창가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A업체가 도착했다.




A업체는 불도저처럼 일을 밀어붙여 성장해왔다. 규모 자체는 중소기업이란 평가를 겨우 면한 정도지만 특허를 받은 기술이 워낙 독보적이라 매번 계약을 이어왔다. 이곳은 일단 하면 된다는 특유의 경영철학 때문인지 걸핏하면 계약내용 이상을 요구하며 회사 간 돈독한 유대관계를 강조했다. 무턱대고 이것저것 찔러보는 탓에 종종 애를 먹곤 했다는 전임자의 넋두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하지만 빈 과장은 아침에 마주했던 부장의 넙데데한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A업체와 인사를 나눈 그는 망설이지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짙은 에스프레소에 깔끔하게 물만 더한 이 커피는 기본에 충실한 만큼 원칙을 고수하며 굳건히 버티기에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아이스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빈 과장.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첫 스타트로 기분 좋게 이번에 우리 쪽 수수료를 2%만 더 높여봅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A업체에만 그렇게 혜택을 줄 거면 애초에 계약서는 왜 있습니까?”


“아니, 이제 얼굴도 계속 볼 텐데 우리 사이에 이 정도도 못해주나?”


들은 대로 ‘우리가 남이가’ 타령이다. 하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우리는 남’이라고 일갈하는 차가운 도시 회사원의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빈 과장은 눈앞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A업체 편의만 봐드릴 수는 없습니다. 계속 이러시면 이번 계약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계약 유지 여부까지 언급되는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서로가 가장 좋은 거래 상대인 건 피차 마찬가지다. A업체는 순간 굳어버린 얼굴을 어색하게 풀며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양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허, 이 사람이! 멀쩡한 계약을 왜 무르나? 일단은 그대로 갑시다, 그대로.”


A업체가 떠난 후, 빈 과장은 미소를 지으며 B업체를 맞았다. B업체는 A업체와는 정반대다. 다짜고짜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는 까다로운 상대였다. 적당히 맞받아치며 마지막까지 좋은 분위기를 유지해야 했다.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온화한 성정을 유지하려면 에스프레소에 우유가 더해진 따뜻한 카페라테가 제격이었다. 카푸치노도 나쁘지 않지만 그는 가벼운 우유 거품보단 묵직한 우유 비중이 높은 쪽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빈 과장님, 이왕 만난 김에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각진 금테 안경을 한껏 추켜올리며 마주하는 눈빛이 매서웠다.


“계약서 26페이지를 보면 납품 단가 산정 조항에 우리 쪽 제품이 최고가보다 25원 낮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어째서죠? 우리 회사 제품 퀄리티를 신뢰하지 못하는 겁니까?”


빈 과장은 지금이야말로 카페라테 버전의 설득 및 달래기 모드에 돌입할 때라고 확신했다.


“아유, 그럴 리가요. B업체만큼 든든한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최근 생산 공정이 새로 개발되었잖아요. 그에 맞춰 B업체도 이번 분기 안에 생산 공정 시스템을 바로 업그레이드 할 예정이고요. 그 부분을 반영한 사항이라 오히려 B업체 제품 단가를 올렸다고 봐야죠.”


빈 과장을 찌를 듯이 솟아올랐던 안경이 스르르 내려가는 걸 보며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흠... 일단은 알겠습니다, 저희도 해당 사항을 고려해보도록 하죠.”


드디어 마지막이다.

빈 과장은 잘게 떨리는 손을 꽉 붙들었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가 요란한 게 심상치 않았다.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를 연거푸 밀어 넣었던 영향이 단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그는 조금만 더 버티자고 되뇌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C업체는 예전 방식을 고수하며 명분을 따지는 일종의 전통파였다. 잠시 고민하던 빈 과장은 녹차라테를 선택했다. 전통차인 녹차와 현대인에게 생명수로 작용하는 커피의 콜라보가 C업체와 이어질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흠, 그런데 이번 계약서에 바뀐 내용이 있더군요. 우리는 기존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성과도 잘 내왔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겠습니까?”


녹차 파우더를 추가해 은은한 녹차 향이 풍기는 빈 과장에게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요, 괜히 지난 몇 년간 동일한 방식으로 거래한 게 아니겠지요. 그런데 최근 우리 기획팀 분석을 보아하니 시장 흐름이 상당히 변할 것으로 예상되더랍니다. 기존 방식도 물론 훌륭했지만 이번에는 저희 의견을 반영해보면 어떻습니까?”


영 탐탁잖은 표정을 보이는 C업체였다. 하지만 시장성을 근거로 내민 제안에 당장 거절 의사를 비치진 않았다.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부정적인 답을 받은 것도 아닌 절반의 성공이었다. 결국, C업체와는 조만간 다시 만나 여러 자료를 토대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빈 과장은 힘겹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사실 이 능력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커피 수용량을 넘기면 카페인 과용 후유증에 시달리는데, 그는 커피 3잔을 해치우며 한계치를 넘어 버렸다.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만치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대는 모습이 술에 진탕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로 달려가 1L 생수 3병을 꺼내 들었다. 몸속 깊숙이 꽈리를 뜬 카페인을 내보내려면 커피 한 잔당 1L의 물을 마셔줘야 했다. 이건 그냥 물이 아니다. 무려 천연 암반수에서 끌어올린 미네랄 퓨어 워터다. 미네랄로 무장한 신성한 퓨어 워터가 시꺼먼 카페인 흔적 따위 깨끗하게 씻어내 그의 몸을 정화시켜 줄 것이다. 빈 과장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페트병 뚜껑을 땄다.


어느덧 아침이 밝았다.

밤새 화장실을 오가며 불룩해진 물배와 거친 사투를 벌였던 얼굴이 퀭했다. 퓨어 워터는 시간과 그의 정신까지 정화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루에 거래처 3곳을 만나는 일정을 짰던 것일까. 그는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멍하니 내려다보며 앞으로 커피는 하루에 1잔만 마시겠다고 다짐하는 빈 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