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5에 256GB, RTX 3070 정도는 돼야 편하게 쓰죠.’
주훈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래, 인정한다. 자칭 ‘아날로그파’이자 타칭 ‘기계치’인 그는 예전부터 기기 장치 관련 용어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휴대폰도 대충 광고에 나오는 기종을 기준으로 삼아 가격과 성능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걸 고르곤 했다. 애초에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거나 알람으로 사용한다든지, 기껏해야 가끔 사진을 찍고 간단한 검색 및 연락 용도로만 사용했기에 자세한 사양이나 기술 같은 부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최근 몇 년 간은 고시공부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사회와 멀찍이 거리를 두었으니 기계치에도 단계가 있다면 자신은 저 끝점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노트북 하나 사는 데 이렇게 알아야 할 게 많은 줄 몰랐다.
그는 지겹고 길었던 고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뒤늦게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학부 시절, 경제학을 전공하며 사회조사분석 관련 자격증을 따두었던 덕분인지 다행히 구직활동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늦깎이 사회초년생이 된 기념으로 노트북을 마련해보자 결심하고 인터넷을 뒤져보다가 도리어 자신이 시대에 뒤쳐졌다는 사실만 깨닫고 말았다.
“노트북보단 데스크톱이 낫지 않나? 조립식으로 사도 괜찮고.”
컴퓨터 용어를 해석해보려 머리를 쥐어 싸맨 주훈을 본 시훈이 슬쩍 말을 건넸다. 주훈보다 3살 더 많은 형 시훈은 컴퓨터와 휴대폰에 관해서는 빠삭했다. 평소 관심 있던 제품 라인이 새로 출시되면 사전예약으로 빠르게 구매하고 어떠한 기술이 적용됐는지 줄줄이 비교하며 분석하곤 했다. 동생인 주훈에게도 기술 트렌드를 설파하며 이것저것 조언을 주기도 했지만, 최첨단의 세계는 탱탱볼마냥 통통거리며 순식간에 귓가에서 튕겨져 나갈 뿐 도통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시훈만이 아니었다. 주훈은 비슷한 말을 친구인 한준에게도 들었다. 어렸을 적부터 라디오, 컴퓨터 등등 손에 잡히는 기계를 심심풀이로 뚝딱거리며 분해하고 조립하던 한준은 지금도 각종 기기를 종류별로 꿰뚫고 있었다. SNS 계정에 별의별 전자기기에 들어간 기술과 시스템 프로그램까지 정리한 글을 틈틈이 올리며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인기를 끌었다.
주훈은 그런 주변을 보며 혼자만 도태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사에 적응을 못하고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과 초조함마저 생겨났다. 이번에 노트북을 새로 장만하려는 시도도 그러한 소외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몰랐다.
시훈의 말을 듣은 주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인터넷 검색창에 또다시 노트북을 입력해보았다. 노트북을 구성하는 조각이라도 건져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컴퓨터 전문가 같은 사람들이 쓴 글을 훑어보던 그는 문득 스쳐 지나간 생소한 단어에 눈길이 갔다. ‘슬로 어답터’라고 적힌 화면이 사진을 찍듯이 글자 그대로 눈에 박혀 들어왔다. 신제품을 좇기보다 실용적이고 편리한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에 주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그의 고민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슬로 어답터’란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것에 열광하기보다 한 발 물러서 지켜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반증이었다. 주훈은 새로 발견한 단어로 자신을 명사의 형태로써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집단을 찾아낸 거였다.
주훈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최신 기종보다 두어 단계 낮은 사양을 가진 노트북을 구매했다. 회사생활을 하며 영상미가 화려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는 취미를 갖기는 힘들 터였다. 요즘 유행하는 영상편집 같은 일도 자신이 할 만할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간간히 예능 클립이나 영화, 드라마 영상이나 볼 목적으로 고사양 노트북은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적당한 속도로 무난하게 사용할만하다는 후기가 적힌 노트북을 마련했다. 그거면 충분했다.
주훈은 ‘지금’을 살아갈 답을 알아냈다.
그는 슬로 어답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