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생겨난 구멍은 순식간에 바닥을 뚫고서 깊숙이 파고들었다. 곳곳에 검은 구멍이 박힌 모습은 땅이 아래로 푹 꺼졌다기보다 오히려 구덩이들이 위로 솟아올랐다 하는 게 맞았다. 그는 어지럽게 뒤섞인 혼돈 속에 똬리를 튼 구멍을 마주한 기억을 힘겹게 끄집어냈다. 스멀스멀 기어 나온 잿빛 안개는 곧장 음울한 날개를 피워 올리더니 흐느적대며 날갯짓을 했다. 파르르 떨어대는 공기 내음을 짙게 들이켜던 구멍은 별안간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그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일련의 모든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고요하게 시작된 탐식은 숨소리조차 나지 않는 침묵으로 끝났다. 그는 제대로 된 발버둥 한번 쳐보지도 못하고 산채로 잡아먹힌 무력한 피식자에 불과했다.
그래, 그랬었다.
그는 검은 구멍 속에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바깥은 온통 선연한 흰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눈을 뜬 지 얼마나 된 것일까. 망막에 맺히는 바깥세상이 희끄무레했다. 그는 반투명한 공간에 갇혀 있었다. 어정쩡하게 널브러진 몸뚱이를 그대로 들어 올려 들통에 구겨 넣은 모양새였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비좁지는 않았지만 팔,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을 정도로 크지도 않았다. 거기다 그 공간은 외양도 특이했다. 사방의 흰색에 부딪혀 튕겨나간 빛을 반사하는 외피가 투명하게 반짝였다. 표면은 얼핏 보면 피막처럼 쭉 늘어날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딱딱하고 단단했다. 다행히 머리 쪽은 볼록한 형태로 평평해서 크게 아프다거나 불편하진 않았지만, 중간과 아래쪽은 마구잡이로 깎아낸 모서리를 되는 대로 이어 붙인 다면체였다. 손에 닿는 벽과 바닥이 울퉁불퉁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신기할 정도로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의식적으로 다리에 힘을 줘야 했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구체가 되다 만 다면체는 둔탁하게 구르기 일쑤였다. 쾅쾅 주먹을 치며 안쪽을 부숴보려 했으나 다면체는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나중엔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혹여 다른 누군가가 들을까 싶어 목청 높여 소리를 질러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있는 공간은 고요했으며 다면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참을 다면체와 씨름하던 그는 점점 지쳐 갔다. 결국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철퍼덕 주저앉아버린(실제론 다리에 힘이 빠져 축 쳐진 모습이었다) 때였다. 저 멀리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덜커덕 거리며 서서히 가까워오는 반투명한 덩어리 안에... 사람이 있었다. 드디어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들어가 있는 다면체보다 거의 5~6배는 커 보이는 크기에 모서리 개수도 훨씬 적었다. 끝단을 거칠게 잘라낸 채로 대충 다듬어버린 듯한, 살짝 삐뚤어져 찌그러진 이십면체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양발을 힘차게 구르며 몸의 반동을 이용해 다면체를 조금씩 앞으로 굴리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우와, 설마 했는데 진짜 나 말고도 사람이 있었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그렇게 작은 데 있어요? 몸이 완전히 구겨졌는데, 얼굴은 들 수 있어요? 말은 할 수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 거 맞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그는 순간 멍해진 정신을 붙잡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었고, 오래간만에 듣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감동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을 건넸다.
“안녕. 나도 여기서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바로 너야. 좁아서 불편하긴 하지만 어쨌든 얼굴은 들 수 있고. 그나저나 여기가 어딘지 알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저도 잘은 몰라요. 학교가 끝나고 학원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이 깜깜해졌어요. 눈 떠보니 이 꼴이던데요. 혼자 가만히 있으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너무 지루해서 이게 움직일까 싶어 밀어봤더니 잘 굴러가지 뭐예요? 그대로 쭉 가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그녀는 흰색 공간에 홀로 떨어진 게 두렵지도 않은지 흥이 잔뜩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거 꽤 재미있지 않아요?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이곳을 탐방하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사방이 그냥 새하얀 평지처럼 보이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지형이 있어요. 어떤 곳은 대리석 바닥처럼 매끈해서 미끄러지듯이 돌아다닐 수 있고, 또 다른 곳은 여기저기에 높낮이가 다른 언덕이 있어서 지나갈 때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어요. 아, 바닥이 뾰족하게 튀어나와서 빠져나오는 데만도 한참 걸리는 장소도 있었어요.”
여자아이는 연신 신난 표정으로 두 팔을 번쩍 들기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편함이 그의 내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해맑게 자신만의 여정을 거쳐 온 이를 자신의 손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죄악감에 가까운 죄책감에 사로잡힌 탓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이 이상한 곳에서 빠져나가려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었다.
“음... 네가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검은 구멍 안에 갇혀있어. 갑자기 생긴 구멍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나를 잡아챈 게 마지막 기억이거든. 그냥 텅 빈 하얀 공간처럼 보이지만 언제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어. 여기서 얼른 나가야 해. 일단 이 이상한 껍데기부터 빠져나와야겠지만.”
“아! 듣다 보니 기억나요. 겉은 새까만데 속은 새하얀 구멍이라니. 정말 종잡을 수 없는 곳이네요. 아까까지만 해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혼자라는 생각이 그다지 안 들었는데, 아저씨랑 이야기하다 보니 가족이랑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이젠 출구를 찾아봐야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쭉 빼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의 뒤편을 가리켰다. 새로운 여정을 떠나려는 몸짓에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전 저쪽으로 가볼래요. 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그녀가 가리킨 방향은 군데군데 음영이 진 흰색 얼룩이 잔뜩 깔려 있었다. 온통 하얗기만 한 공간이라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저 정도로 들쭉날쭉한 흰색이 도처에 산재해있다면 보통 험한 길이 아닐 게 분명했다.
“저쪽은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차라리 나랑 같이 가지 그러니? 그게 좀 더 안전할 텐데.”
아무래도 혼자보단 둘이 나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가 가고 싶은 길을 가면서 좀 더 많은 걸 보고 싶어요. 그러다 출구를 찾아내면 저를 기다려준 가족과 친구들 앞에 짠하고 나타나 여기서 겪은 일들을 밤새 이야기할 거예요. 어떤 길이든 괜찮아요. 뾰족한 지형에서도 힘들긴 했지만 결국은 제 힘으로 빠져나왔는걸요. 여긴 어디든 전부 하얄 뿐이잖아요. 아저씨도 그냥 가보고 싶은 곳으로 가 보세요. 쭉 가다 보면 분명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다음번엔 밖에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인사를 건네곤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멈추지 않고 힘차게 다면체를 굴리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서슴없이 미지의 길을 탐험하며 모든 비밀을 밝혀내고야 마는 위대한 개척자 같았다.
그는 그녀가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웠다. 그에겐 저렇게 떠날 용기가 없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다면체와 주변을 둘러싼 흰색이 지긋지긋했기에 일분일초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바깥의 안온한 일상이 그리웠다. 그럼에도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뾰족한 바닥까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다면? 정신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다 이 다면체가 깨져버리기라도 한다면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도 벗어나고 싶었던 다면체였는데, 이젠 잘못하다 다면체가 부서질까 걱정이었다. 그는 출구에 닿을 때까지는 다면체 안에 있고 싶었다. 답답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후에는 이 가볍고 단단한 다면체가 그를 지켜주는 갑옷의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봤자 답은 없었다. 불안과 걱정으로 침잠할 시간에 출구를 찾아보는 게 나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여자아이가 향한 반대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간혹 그를 날카롭게 찔러대는 의구심에 지쳐 널브러질 때도 있었지만 계속 나아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또다시 그를 덮치는 우울과 절망이 체념이라는 절벽에 다다라 무기력하게 늘어지려 할 즈음이었다. 스르륵. 무언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홱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또 다른 다면체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이 하얀 공간과 비슷한 색의 흰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유롭게 다가왔다. 다면체는 노인에게 딱 맞았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에 모서리가 다 깎여 거의 구체에 가까운 형태였다. 뒷짐을 지고 산책을 하는듯한 느릿한 걸음걸이를 옮기는 노인은 다면체를 굴린다기보다 이 공간을 유유자적하게 거닐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어르신! 어쩌다 이곳에 오셨습니까? 너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정말 눈물 날 정도로 반갑네요. 저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으십니까?”
“허허. 이렇게 헤매고 있는 사람은 나도 참 오랜만에 보는데. 이미 많이들 나갔다네. 이제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얼마 없을 게야.”
“네? 다른 사람들이 그리 많았습니까? 다들 나갔다고요?”
“그럼. 바닥에 다른 이들이 지나간 흔적이 잔뜩 있지 않나.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출구가 있네. 혹시나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 있으려나 싶었는데 내가 마침 딱 맞춰 왔구먼.”
노인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여 보니 바닥 여기저기에 끌리고 쓸린 흔적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에 머무르다 떠난 거였다.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 그는 감격에 젖으면서도 혼자만 뒤쳐진 것 같아 초조해졌다. 노인은 그의 다면체를 다정하게 두드리며 그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들은 출구가 있는 방향으로 다면체를 틀었다.
얼마 안가 출구가 나타났다. 그러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문의 형태가 아니었다. 출구는 그를 무자비하게 집어삼킨 검은 구멍을 닮았다. 구멍 근처로 까만 연기가 불길하게 넘실댔다. 한이 서린 거대한 터널 입구를 보는 것 같은 광경에 그는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인자한 미소로 자신을 인도한 노인은 애초부터 이 하얀 공간에 속한 존재일지도 몰랐다. 불길한 의심이 그의 마음속에 불길처럼 일었다. 그런 그를 눈치챈 듯 노인은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검은 구멍을 꼭 닮은 출구라니, 이상하지? 이 공간에 들어올 때 겪었던 어둠을 다시 견뎌야 밖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자네 말고도 많은 이들이 여기서 한참을 망설이고 서성였어. 그래도 다들 마지막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스스로 저곳으로 들어갔지. 자네보다 한참은 어린 소녀도 용감하게 떠났다네.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오는 길에 만났다는 아저씨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자네인가? 껍데기 크기나 모양이 비슷한데.”
“그 여자아이가 여기 왔었습니까?”
“그랬지. 자기 몸집보다도 커다란 껍데기를 열심히 굴리며 여기까지 와선 가족들에게 갈 수 있다며 기뻐했어. 떠나기 전에 자네가 여기에 왔는지 나에게 물어봤지. 혹시나 만나게 되면 인사를 전해 달라 했다네.”
자진해서 검은 구멍에 들어가는 건 두렵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견뎌야만 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하얀 세상은 싫었다. 하얗고 검은 시공간을 나갈 때가 왔다. 편히 몸을 뻗지도 못하는 고통스러운 다면체를 버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