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리언 그래피티의 매력 - 꾸리치바편
2016년 여름에 나는 인생 첫 해외생활을 경험한다. 생활 초반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상당히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첫 한 달, 읽기는커녕 말하기 듣기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혼자 어디에 가서 뭘 한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홀로 방에 있자니 답답하여 하염없이 돌아다니곤 했는데, 도시 곳곳에서 내 눈과 마음을 달래주는 훌륭한 볼거리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래피티이다.
사실 브라질은 그래피티로 나름 유명한 나라이다. 여기서 그래피티는 상업용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그래피티라는 말뜻에 벽에 태깅하고 다니는 낙서가 포함되어 사용된다.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도 '낙서' 수준이니 그래피티 하는 친구들은 여기 맺힌 한이 많다. 반면 브라질에서는 그래피티 안에 낙서라는 말뜻은 담겨있지 않은 듯하다. 주로 대가를 받고 그리는 상업적 예술행위를 뜻하며, 낙서 개념으로는 삐슈(Pixo)가 있다. 공공기물에 낙서하는 행위는 삐샤썽(Pichação, Pixação),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삐샤돌(Pixador)이라고 부른다.
브라질 '낙서 벽화', 기네스북 등재 추진 / YTN
https://youtu.be/KBeqRnKfmuo
'낙서 벽화'라고 표현되긴 했지만 브라질리언 그래피티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뉴스인 것 같아 가져왔다. 여행하는 입장에서도, 사는 입장에서도 일상을 좀 더 풍요롭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쓰고 있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래피티'가 대체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국립국어원에서는 '그라피티'와 '길거리그림'을 사용하고 있는 듯 하나, 음, 그라피티만큼의 느낌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잠시 삐슈 PIXO 라는 다큐멘터리를 소개한다. 주앙 바이네르 João Wainer와 호베르뚜 올리베이라 Roberto T. Oliveira의 2009년 작품이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영상이지만 내가 브라질에 있었던 2018년 초까지만 해도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1시간 분량에 영어 자막이 달려 있으니 관심 있으시면 한번 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skGyFowTzew
삐슈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길거리 낙서와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읽을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을 보고 있자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야민정음'이 생각나기도 한다. 작중 등장하는 한 청년은 글자는 모르면서 삐슈는 읽기도 한다. 민가 담벼락부터 빌딩, 열차, 항공기, 문화재까지 가리지 않는 페인트칠, 그 사회적 배경은 어떠한가.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스스로를 하층민(혹은 예술가)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향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존재의 외침 아니겠는가.
영상은 삐슈에 대하여 삐샤돌의 입장, 경찰의 입장, 시민의 입장, 건물 관리자의 입장, 그리고 나와 같은 제삼자의 입장까지 여러 시선에서 다루고 있다. 삐슈를 찍지 않아서 사진 자료가 없는 것이 아쉽다. 과연 삐슈는 예술인가, 반달리즘인가? 나중에 단독으로 다뤄 볼 만한 주제이다.
서론이 길었다. 여기저기서 찍은 벽화 사진이 많다. 오늘은 우선 꾸리치바(Curitiba)에서 찍은 사진 중 내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사진들만 올려 보려 한다.
한때 꾸리치바를 누볐을 트렘을 그린 벽화이다. 본지(Bonde)라고 부른다. 꾸리치바의 가장 중심부에는 '꽃길(Rua das flores)' 이라고 불리는 번화가가 있는데 그곳에 이 벽화와 똑같이 생긴 트렘 모형이 남아있다. 지금은 내부를 어린이용 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나름 꾸리치바 명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구절초 비슷하게 생긴 꽃 그림이 있는데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는 모양이다. 꽃길에 가 보면 바닥의 돌을 꽃무늬로 박아 두었으며 화분에 꽃도 많이 심겨 있다. Praça Carlos Gomes에서 촬영.
꽃길의 딱딱한 돌바닥을 따라 걸어내려 가다 보면 꾸리치바 성당으로 알려진 '삐냐이스의 빛 성모 마리아 성당(Catedral Basílica Menor de Nossa Senhora da Luz dos Pinhais)'을 짓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를 만날 수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작은 글씨로 성당 건축의 역사가 짤막히 소개되어 있다. 18세기부터 수백 년 동안 여러 번 형태를 바꾸며 유지된 역사 있는 성당이다.
구시가지 Largo da Ordem에서는 매주 일요일 장이 선다. 수공예품이 많이 거래되는 편이며 간식류와 골동품도 볼 수 있다. 까사 호프만(Casa Hoffman)은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이자 춤 공연장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넓은 무대가 펼쳐진다. 탱고, 쌈바, 플라멩코, 현대무용까지 여러가지 춤 관련 세미나와 원데이클래스가 열린다.
스텐실 레이 찰스이다. 마레샬 데오도루 길(Rua Marechal Deodoro)의 명물인데, 모션 레이어즈(Motion Layers)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아래 소개하는 그림과 함께 꾸리치바를 대표하는 거대 벽화이다. 재미있는 것은 둘 다 주인공이 미국인이다. 브라질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만큼이나 미국 문화 콘텐츠를 좋아한다고 느낀다.
영화 샤이닝(The Shining)의 그 장면이다. 누군가 잭 니콜슨이나 스탠리 큐브릭을 엄청 좋아하는 모양. 아래에도 개성 있는 그래피티가 있는데 저 자리 그림은 꽤 자주 바뀐다. 과이라 극장 근처에서 촬영.
Motion Layer 프로젝트 참여 작가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아래 아이디로 검색하면 만나볼 수 있다.
@leandrocinico
@celestinodimasdimas
@_artestenciva_
꾸리치바 구시가지 중심지인 Largo da Ordem 근처의 빠라나 박물관 쪽 비탈길 어딘가에 있는 작은 벽화. 왼쪽 아래의 만트라 패턴 비슷한 무늬가 인상적이다.
상파울루 벽화 마을 느낌인데 꾸리치바 감성이 들어가 있다. 한국에서 하면 안 되는 그것의 느낌이 잔뜩 담긴 벽화. Alto da XV 지역 어딘가에서 촬영.
꾸리치바를 비롯한 빠라나 주 전역에서 큰 신발 유통 사업을 하고 있는 안다라끼(Andaraki)의 광고 벽화이다. '여기를 걷는다'는 의미(Andar aqui)를 연상시키는 센스 있는 작명이다. 집 근처 어딘가에서 촬영.
남미에서 가장 큰 공연장을 보유하고 있는 과이라 극장(Teatro Guaíra) 앞에 항상 세워져 있던 밴을 찍어 보았다. 엄밀히 따지면 그래피티는 아니지만 고급 극장의 정체성을 잘 설명하고 있는 그림이다.
Confeitaria e Pizzaria Teatro, 굳이 옮겨 보면 '극장 빵·피자' 정도 되는 식당 모퉁이에 그려진 벽화이다. 과이라 극장 앞에 있다.
브라질의 웬만한 도시에서는 시에서 운영하는 시장이 하나씩 있는 것 같다. 상파울루의 경우에는 청과물 도매시장인 가락시장 공판장 같은 느낌인 반면 꾸리치바는 비교적 쇼핑센터에 가까운 느낌이다. 식당가와 상점가가 위아래층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장소이다. Mercado Municipal 내부 촬영.
내가 살던 집 앞 광장은 청량리 버스환승센터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시 중심부이기도 해서 골목마다 호텔, 빌딩, 식당, 상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다. 그래서 거리를 다닐 때 느낌은 항상 시장통을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사진은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에 그려진 그림이다. 무슨 의미일까 짐작만 해 본다. Praça Rui Barbosa 근처에서 촬영.
시 중심부에서 바떼우(Batel) 동네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까페 하우시(Café Rouse). 퇴폐미를 뿜는 고양이 한 쌍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갈 때마다 공사 중이어서 한 번도 못 들어가 본 곳. 커피와 알콜음료를 같이 판매한다.
꾸리치바 출신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그리기도 한다. #poseiaemcores 로 검색해 볼 수 있다. 어설프게나마 번역해 보면 이런 내용이다.
「깨어남」
- 아델리아 마리아 보엘네르 (Adelia Maria Woellner)
나는 문들을
창문들을 열 것이다
내게는 그 틈을 뚫고 들어오는
빛에 대한 권리가 있다
보엘네르는 1940년생의 여성 작가이다. 꾸리치바는 대학생의 도시이기도 하고, 실제로 무슨 일이 있으면 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한다. 브라질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기에 독재를 겪은 나라이기에 시에서 말하는 내용이 어떤 뜻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데지헤 벨로주 (Desireé Veloso)라는 꾸리치바 여성 작가(블로그 바로가기)이다. 책도 여러 권 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춤추듯 운율이 살아있는 시인지라 번역하기가 참 어렵다. 원문만 옮겨 적어 본다.
「Entenda a tempo」
- Desireé Veloso
Pulei no tempo
Dancei pelo movimento
Criei teu invento
Sem tormento
Dormi ao relento
Desperdício ou contratempo
Escrever ao vento!
Praça Carlos Gomes 인근에서 촬영한 것으로 기억한다.
빠울루 레밍스키(Paulo Leminski)도 꾸리치바 출신 시인이다. 브라질은 나라가 크다 보니 국내 문학을 구분할 때 지역별로 분류한다. 남부지방 작가 목록에서 항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존경받는 작가이며 실제로 꾸리치바 시내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에 관한 사진, 기록 등을 자주 볼 수 있다. 나중에 얘기해 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빠라나 연방대학교 근처에서 촬영.
꾸리치바 사진 박물관에 가 보면 이런 지도가 있다. 여기저기 숨겨진 벽화를 찾아보라는 작품이다. 하루 날 잡고 종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기 좋다. 뜬금없이 저런 사진인가 싶겠지만 나름 그런 이유가 있는 작품들이다. 다음에 미술관 / 박물관 소개할 때 다시 설명해 볼 예정. 벽화는 집 근처 Rua Dr. Pedrosa에서 촬영했다. 아마 소방서 근처였던가 그렇다.
꾸리치바는 일단 이 정도만. 다른 동네 벽화 보다가 이 사진들 보면 확실히 꾸리치바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우중충하고 추워서 그런지 빈티지를 느끼는 감성이 다르다. 글 쓰다 보니 용어 사용이 어렵다. 아는 만큼 보일 텐데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아 참 아쉽다.
다음 편은 꾸리치바를 떠나 이곳저곳을 다니며 찍었던 사진들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이다. 사실 브라질 1년 살았지만 못 가본 곳이 태반을 넘는다. 너무 넓어서 핵심만 다 보려고 해도 1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언제 또 다시 갈까?
꾸리치바 10개 벽화 소개 (포르투갈어)
https://www.tha.com.br/entretenimento/10-murais-de-curitiba/
Motion Layers 프로젝트 소개 (포르투갈어)
https://romulozanotto.com.br/motion-layers-tatuando-a-cidade-6b2f8d1cbec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