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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Newyorker May 06. 2020

코로나가 쏘아 올린 미국의 일상

마스크와 자유 그 사이 

지난주, 뉴욕은 처음으로 일일 사망자가 300명 이하로 처음 떨어지는 마일스톤을 지났다. 쿠오모 주지사는 잠깐의 자축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다시 10여 명의 사망자가 증가하자 다시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같은 날, 뉴저지 머피 주지사는 공화당을 비롯한 저지 쇼어(뉴저지주 해변가 타운을 통칭하는 말) 일대의 시민들이 요구했던 뉴저지주 내 공원 개방을 결정하면서 사회적인 거리두기는 여전히 유효하며 강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시민들은 홀연히 찾아온 초여름 날씨를 즐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펠리세이드 파커 웨이를 따라 허드슨강과 공원을 찾기 위해 길게 줄이어 서 있는 차들을 보노라면, 미국인들에게 자유는 어쩌면 공기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 전,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홍세화 작가의 수필집에서 톨레랑스라는 말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던 모습이 기억난다. 관용으로 번역되는 톨레랑스는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 하지만 그것에 대한 동조의 개념은 아닐 수 있다. 동시에 동조를 하지만 나 역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 사회에 톨레랑스가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 미국은 코로나가 쏘아 올린 일상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들에게 봄이란 파릇파릇 자라 오른 잔디의 우순을 잘라내어 만들어낸 청량감과 함께 소다의 상큼함과 핫도그의 단짠이 조화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에서 야구를 구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맞이한 봄은 집안에서 느려 터진 인터넷을 통해 업무를 보고,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아이들에게 아이패드 하나씩을 쥐어주며 찰나의 쉼을 즐기고 있다. 물론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배달되어온 음식에 혹시 모를 바이러스를 걱정해 다시 한번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는 것은 애교로 봐주자. 매일 지나다니는 엠뷸런스를 볼 때마다 오늘 또 누가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밖으로 나가고 싶을 때마다 마스크와 손세정제, 그리고 니트릴 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상태를 유지 한지 한 달째, 드디어 이러한 모든 일상이 무감해지고 있다. 

이제는 '그래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게 나을지 몰라'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비키니와 젊음을 만끽하겠다는 이유로 브루클린 공원에 모여 야외 선텐 파티를 즐긴다. 이러한 와중에도 길 건너 병원에서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 죽어가고 있으며, 오늘도 전해지는 아들 선생님의 부모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지금 미국이 받아 든 코로나 성적표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다. 연방 정부는 그저 숫자 놀음에 빠져 있으며, 민간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무기를 고르면서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만 한다면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이들의 생각은 어쩌면 미국이라는 국가의 시작과 맥이 닿아 있는지 모른다. 

야구 7회가 끝나고 몸을 풀기 위한 순간에도 애국심의 발로를 잊지 않으며, 매번 메이저리그 경기에는 베테랑으로 불리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군인과  First Responser (경찰과 의료진, 소방직 공무원을 통칭하는 말) 들을 위한 시간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 자유로 무장한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애국심이라는 끈끈한 접착제에 계면활성제를 들이부어 버렸다. 코카시안(백인)이나 흑인 이외의 인종 (사실 흑인도 거의 포함되지 않는 경향성이 있다)에게는 외부 자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스스로 순수 혈통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을 건설한 아버지들은 백인이라는 이들의 믿음은 마스크에 구멍을 뚫어 자유를 외치는 편의점 직원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전히 미국은 이러한 자유로 나타날 수 있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내가 살고 있는 콘도의 가장 끝에 살고 있는 캐럴은 이메일을 통해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물으면서 자신의 일상을 작게나마 공유한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있는 그녀는 한국에 가서 안전하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아직도 여기에 머물러 있다. 아이들과 두 달째 집에 머무르면서 인터넷에서 본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지고 올 변화를 꿈꿔 본다. 나와 내 가족이 빠진 연결 고리는 다음 성냥에 불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본 지금의 미국은 마스크와 자유 그 중간 어디 즈음에서 갈길을 잃었다. 그리고 횃불을 들고 있어야 하는 지도자는 지금 없다. 다음 지도자 역시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을 모르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지금 이들이 믿는 것은 미국이 지금까지 유지 해왔던 지성과 공동체 의식이 다시 한번 살아나 주길 바라는 것뿐. 오늘도 미국인들은 매일 7시면 죽음의 갈림길에서 생명을 구하는 모든 퍼스트 리스 판서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박수를 치고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피자라도 대접하기 위해 돈을 모으면서도 감염의 우려 때문에 걱정하는 이들을 위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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