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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 Feb 03. 2018

전쟁터의 월하미인--군중낙원

Make Love, Then War


천지안빈(陈建斌,라우장/장 상사 역 )없었다면 영화 군중낙원이 망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그리워 바다를 향해 외치는 그 목소리와 표정, '종업원' 8호인 지아우 불쑥 내뱉은 말에 피해왔던 현실을 마주쳤을 때의 울분과 절망. 그리고 성욕보다 활씬 거대하고 감당하기 힘든 감정은 천지안빈이 관객에게 온전히 전했다.   


7호 니니로 역을 맡은 만천(万茜)은 꽃잎이 겹겹이 피어난 것처럼 연기를 했다. 그녀의 역할은 자연스러우며 드러나지 않게 '월하미인' 꽃이라는 상징과 호응한다. 831부대에서 생겼던 인간관계, 애증와 희비, 그리고 '종업원'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이야말로 월하미인 꽃이다---밤이 되어야 피고, 몇 시간만에 시든다.  


반면,  8호 천이한(陳意涵)은 안간힘을 쓰고 연기했지만 아쉽게도 2008년 데뷔 때와 비교해 두드러진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8호는 내면의 상처와 불안을 재화에 대한 물욕으로 투사했지만 그 감정은 그녀의 내면에 여전히 존재하는 인물인다. 하지만 천이한의 표현력은 미숙하고, 목소리는 현실성이 부족하다. 남주연 원경천(阮經天)의 경우도 비슷하다. 역할에 몰입하고자 하는 노력은 화면 곳곳에 배여 나지만, 중국 요리 표현어인 火候(훠허우. 불의 세기나 상태를 뜻하며 능숙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식자재 특성에 따라 불의 크기와 시간을 잘 조절해야 맛있는 요리가 나오겠죠)가 부족하다. 


게다가, 유승택(鈕承澤)감독은 찍은 장면이 아까워서인지 편집을 냉정하게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바오(남자 주인공)와 니니가 손잡고 좁은 골목과 반딧불이 있는 논밭에서 뛰는 장면은 참 어색하다. 영화 속 군더더기 장면들은 마치 싱싱한 식자재에 과하게 투입된 조미료 스토리 몰입을 방해한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주제와 주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소재를 준비하셨지만, 영화 구성은 늘어지고, 입체적인 인물들이 평면적인 인물로 표현된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볼 만한 이유는 '전무'이다. (후무는 아니길을 바라면서). 이 잊혀진 역사를 조명한 영화는 없었다. 


1949년 전후 라우장처럼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전면 철수한 청년들은 무려 60만 명이었고, 일반인을 포함하면 200여만 명이었다. 참고로 당시 대만 총 인구는 약 600만 명이었고, 대만 전체 인구의 1/3 해당하는 인구 유입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를 일으켰다. 나중에 "외성인(外省人)"라고 불리는 이들은 길어도 몇 년 후 다시 중국 본토에 돌아갈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고향과 가족 사이에 생리사별이라는 선을 그었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 알겠되었다. 


철수 초기엔 군인들은 결혼히지 못한다는 금혼령이 있었다. 그럼 그 방대한 성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군심을 안정시키려고 1952년 장개석의 유일한 아들인 장경국(蔣經國) 당시의 총정치작전부주임이 "군대찻집" 운영을 허가했다.


차 없는 찻집은 즉 군중낙원, 831부대, 누구라도 얘기 꺼내기 힘든 과거,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 속의 1969년은 중국 본토 철수 후 20년이 된 시점이었다. 금혼령 해제에도 불구하고 일반 군인들이 결호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어서데다, 세업(집안 전승되는 직업과 재산) 있는 본성인(本省人, 일제 강점기 전에 대만으로 온 중국인)보다 가난하였고, 심지어 본성인과 의사소통까지 문제가 있다. 북경어와 민난어(閩南語) 둘 다 할 줄 아는 젊은 세대인 바오가 통역해줘서 장 상사가 전당포에서 거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당시 전당포 주인과 같은 연세(세업도) 있는 본성인들은 주로 민난어와 일본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낮은 계층인 외성군인은 장애인이나 원주민 소녀 등 사회 조건 좋지 않는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831부대는 1992년 까지 존재했던 하였다. 2006년, 831부대에서 '종업원'을 관리했던 군인 출신 엽상희(葉祥曦)가 '군중낙원 비사'라는 수필을 월간지에 발표했다. 대만 사람들에게는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가 공개된 것이다. 유승택 감독은 이 글을 읽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고, 그는 이 과거를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영화 촬영과 상영은 순조롭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여러 장면 속 대만 국기 때문에 상영 자체가 금지되었다. 영화 촬영 사전 헌팅 시 스태프 중 한 명의 중국 국적이 문제가 되어서 유승택 감독은 법원에서 징역 5개월, 집핸유예 2년, 벌금대만 달러 60만원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이러한 해프닝은 일부 대만 관객의 거부감을 부추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게 생긴 것도 사라진 것도 시대의 요구였을 뿐이다." 831부대에 대해 유승택 감독 말했다.


대만과 중국이 분리된 지 67년이 흘렀다. 한 때 "총알과 새만 날아갈 수 있다"고 했던 좁은 해협사이에는 오가는 항공기 회수만큼 교류가 빈번하다. 그리고 831부대 사라진 지 벌써 25년이 지났고, 1949년에 대만에 온 청년 군인들도 이제 거의 다 고인이 되셨다. 하지만 전쟁과 패퇴 그리고 전투력 유지를 위한 금혼령과 군대찻집 운영 속 군인과 종업원들의 삶과 아픔은 현대사의 흉터로 남았고, 이제 그 흉터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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