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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가 고양이를 물면 생기는 일

들이댐 총량 법칙

by lqpa


업무에 나의 말발이 먹히면 재미가 붙습니다.

붙는 게 또 하나 있죠. '자신감'

뭐든 잘 쓰면 약이지만 때론 독입니다.



자신감이라는 녀석은 늘 '무모'와 '용기'에 두 발을 얹아놓고 어디로 튈까 탄력을 기다립니다. 누군가 당신 최고야 하는 '엄지 척' 탄력.





일을 잘했나 못했나 검사(감사) 하는 기관이 있습니다. 보통 정부기관을 생각하지만 금융권은 파워풀하게 특화된 곳이 하나 더 있습니다. 누가 힘이 세나 겨루는 기사가 종종 나오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형, 작은 형일뿐 저에게는 둘 다 형님이니까요.



보이지 않지만 아주 센 힘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시하며 살아도 될만한 자유로운 경제력과 쉽게 건들 수 없는 힘을 따로 챙겨두지 않았다면, 대개가 '굽실'모드로 살아가는 이유일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힘을 몸소 겪기 전까지는 잘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일 좀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할 즈음, 제대로 된 정기감사가 시작됐습니다. 보통 같은 해에 두 곳이 모두 나오지 않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해는 시차만 뒀을 뿐 두 기관이 모두 감사를 나왔습니다. 어찌어찌 한 곳을 잘 넘겼는데 그것이 대단한 일처럼 집중 조명되며 제 어깨를 들어 올렸습니다. <할 만한데>라는 '자신감' 백신을 자발적으로 주입하면서 딴딴한 면역체계가 발동하고, 무모를 용기라는 항체로 바꾸면서 어떤 균이든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은 원기를 충전합니다.



다른 곳의 감사가 시작됐습니다.

누가 봐도 작은 형인데 칼날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이미 큰 형님 감사를 잘 치른 저는 자신감 뿜 뿜으로 업되어 있었고 크게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일처리라면 더더욱 문제 될 게 없다는 강한 신념으로 매듭을 묶고. 자!



드디어 호출이 왔고 저는 팀장님과 함께 감사장을 찾았습니다. 그냥 봐도 어린 엘리트들이 책상에 앉아 서류 뭉치를 파고 있었죠. 한참 삼촌 뻘인 팀장님이 그들을 향해 90도 인사와 절도 있는 공손을 뿌렸지만 그들은 마치 훈련받은 것처럼 시크했습니다.



'이 사람 보게..'



친동생이었다면 양볼에 지장을 찍어줬을 장면. 저의 면역계가 흔들리며 기분 상심 게이지가 상승하는데, 그가 까딱 손짓합니다.

우리는 젊은 엘리트의 수신호를 따라 소파에 앉았습니다. 털끝 같은 심기 하나 건들지 않겠다는 팀장님의 비장한 두 손 모으기가 점점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팀장님을 보고 앞에 있는 그를 보는 나의 눈에 독이 서려 갑니다. 범법자를 앉혀놓고 취조하듯 털어대는 감사자의 저 태도. 이 젊은이의 심장을 찌르기 시작합니다.



'어린 노무시키...집에 어른 안 계시냐'

'그래 봤자 월급쟁이다, 살살하자'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냐'

'너도 퇴직하면 닭 튀길지 모른다 너무 그러지 말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뒤

몇 번의 눈빛을 주고받던 순간, 드디어 예민한 질문 하나가 쑤욱 들어옵니다.



"수의계약하셨네요?"
"네!"

"근거는요?"
"긴급한 상황이라 00조 00항에 의거..."
"긴급한 건 000 과장님 사정이죠."
"네?"



뭐지. 이게 말로만 듣던 바로 그건가.



1초가 흘렀습니다.

뭔가를 눈치챈 팀장님이 저를 툭치며 잘랐지만 저는 잘리지 않았습니다. 말을 안 하면 잘못이 없는데도 잘못했다는 모양새요, 법은 유권해석이며 정당하게 처리했으니 문제없지 말입니다. 이미 맞아둔 '자신감' 백신이 약효를 발하는 순간, 그대로 받아쳤습니다.


"입찰로 업체를 다시 뽑으려면 10일은 더 걸립니다. 그때까지 추가 비용도 나오고요. 아는 업체랑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국가계약법대로 2개 이상 견적 받아 예산팀 합의받고 진행했습니다."



띠.

로.

리.



지금 생각하면 낯 뜨거워 어금니를 꽉 깨뭅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툭하고 나왔을까요.

쐐 한 느낌은 바람이 차가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차범위 1%짜리 훌륭한 답변이었노라 스스로 감탄하던 저는 석화된 팀장님의 회백색 낯빛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잠자던 고양이의 수염을 물어뜯었다는 것을.


"그런가요? 그럼 이런 계약이 얼마나 더 있는지 좀 봅시다."
"…"


감사의 목적이 잘못을 찾아내고 바로잡는 일인지라 검수 대상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들이 가져갈 실적 거양의 확률은 높아집니다. 검사 범위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면 자료를 준비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나의 똥이 굵다 할게 아니라 한 번 접고 들어갈 일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틀리지 않았으나 그대의 뜻을 고려하여) 앞으로는 수의계약을 지양하겠노라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쥐가 고양이를 물면 살갗에 약간의 스크래치만 입힐 뿐, 바로 먹힌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감사가 끝나면 그들도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므로 넣고 뺄 내용을 정리합니다. 팀장님은 보고서에 그 내용을 빼느라 좀처럼 안 쓰는 인사각 180도짜리를 쓰셨습니다. 제가 아주 큰 일을 했죠. 아주 큰. 일.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걸까요. 큰 형님을 제쳤으니 그 여새를 몰아 작은 형도 제치고 싶었던 걸까요.

범을 잡았는데 고양이쯤이야 했던 걸까요.

아니면,

나도 쫌 하거든?



덤벼!



였을까요.



만용은 '용기'가 넘칠 때 쓰는 말이니 그나마 낫습니다. 얻을 수 없는 수준을 넘어 잃어버리는 마이너스는 '무모'죠. 내가 앞니를 드러내 물어도 될 상대인지 구분하는 합리적 스킬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구분의 가장 큰 기준은 대내냐 대외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정글이라고 다 같을 순 없습니다. 조심조심 걷는 사내에서는 그나마 내 새끼라 감싸줄 팀/부장님이라도 있지, 대외는 그들도 꿀꺽 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즐비합니다. 혹시 아나요. 시범케이스로 날 먹으려 든 고양이가 알고 보니 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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