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는 죽음에 대해 잘 얘기하지도 않고, 장례식에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기에. 난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꽤 오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떤 스님이 쥐띠는 오지 말라던
첫째 큰 아버지 장례식. 동생은 쥐띠라고 못 갔는데 개띠인 나까지 못 갔다. 그 장례식에서 집안 여자들 모두 다리에 극심한 근육통을 얻었다거나- 어른들은 '다리를 쳤다'라고 표현했다 -근래에는 큰 고모 장례식에서 한 중년 여성이 심하게 울다가, 갑자기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등 흔히 '빙의'라고 하는 이상 행동을 보여, 급히 정신과로 옮겨 진찰받은 일이 있었다.
이상 이런저런 이유로
장례식은 으레 참석하지 않는 행사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장례식은 떠나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남은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의식이다.
현장에 가서 영정 사진을 보고 헌화하고
슬픈 얼굴들을 마주하고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비로소 그 죽음이 인정된다. 뇌리에서.
그렇지 않으면, 항상 그렇듯 '어딘가 잘 살고 있겠지'하는
막연히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다' 여기는 상태에 머문다. 내 의식 속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 카테고리에 고인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만 같고, 떠났다는 게 실감 나지 않고
내 마음속에 내내 씁쓸한 감정으로 머물면서 살아있다 묻히기를 반복한다.
자꾸 의식으로 올라와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어야 한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거다.
내 가슴속에서 이렇게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들이 벌써 몇인가.
그래서 이제 난 웬만하면 장례식은 반드시 가려고 노력한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를 '사부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사부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만큼 낯이 두껍지는 못했다.
그분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분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그 집의 살림과 세간을 속속들이 보고 느끼고
마당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가끔 질문을 받으면, 난 문어체로 말하는 사람이라 적잖이 당황하셨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었다. 눈에 띄는 한 명이고 싶었다.
그러나 글 잘 쓰고 예쁘고 견고한 자기 세계를 자랑하는 수많은제자들에게그는 늘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건방져서 대하기 꽤 거북하기도 했고.
한 번인가 두 번
그가 내게 덕담을 건넨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 기억을 더듬으니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잘 다듬으면 다이아몬드가 될 거라고. 그 잘난동기들 앞에서.
누구한테라도 할 수 있는 얘기이긴 한데, 내겐 꽤 특별한 기억이다.
직장 다니면서 힘들 때
아무 기대하지 않고 넋두리를 길게 써서 징징대는 문자를 보냈는데
곧바로 답이 왔다. '힘!'
그 짧은 한 마디에 깊은 울림이 있었다. '힘내'하면 팔짱 끼고 관전하면서 립 서비스하는 감이 있는데 '힘'하면 안수 기도 혹은 기치료받는 느낌이랄까. 지금 난 누군가에게 주제넘지 않으면서 응원하고 싶을 때 그분처럼 짧게 '힘'이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숙제도 잘 안 해오고
모임 참석도 뜸해지다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중간에 어려운 일 있을 때 걱정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 '마음이 힘들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했던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분의 이름이, 짧은 연이, 존재 자체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혹여 내가 그분에게 누가 될까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 뭐하는 사람이야?' 했을 때
답할 수 있는 내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 겨울
그 봄
그 여름
그리고 가을
한참을 걸어 올라갔던 눈 쌓인 산길
물소리 졸졸 들리던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산길
잔뜩 겁먹은 새가슴에 따라붙은 작은 날파리 하나 의지하여 오르내리던 길.
수업을 기다리며 배회하던 산책로 차고 매웠던 공기
첫 만남에서 접했던 흰 옷과 길게 땋아 내린 머리
수업 마친 일요일 아침 모처럼 다 데려가 춘천에서 사주신 막국수. 막국수에는 노란 연겨자를 쳐야 한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