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울민트 Apr 29. 2022

잠깐 멈추어 서서

선생님께

어려서부터 난 보호받았다. 적어도'죽음'에 대해서만큼은.

내 부모는 죽음에 대해 잘 얘기하지도 않고, 장례식에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기에. 난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꽤 오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떤 스님이 쥐띠는 오지 말라던

첫째 큰 아버지 장례식. 동생은 쥐띠라고 못 갔는데 개띠인 나까지 못 갔다. 그 장례식에서 집안 여자들 모두 다리에 극심한 근육통을 얻었다거나- 어른들은 '다리를 쳤다'라고 표현했다 - 근래에는 큰 고모 장례식에서 한 중년 여성이 심하게 울다가, 갑자기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등 흔히 '빙의'라고 하는 이상 행동을 보여, 급히 정신과로 옮겨 진찰받은 일이 있었다.


이상 이런저런 이유로

장례식은 으레 참석하지 않는 행사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부작용이 있었는데

그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장례식은 떠나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남은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의식이다.

  

현장에 가서 영정 사진을 보고 헌화하고

슬픈 얼굴들을 마주하고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비로소 그 죽음이 인정된다. 뇌리에서.


그렇지 않으면, 항상 그렇듯 '어딘가 잘 살고 있겠지'하는

막연히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다' 여기는 상태에 머문다. 내 의식 속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람' 카테고리에 고인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만 같고, 떠났다는 게 실감 나지 않고

내 마음속에 내내 씁쓸한 감정으로 머물면서 살아있다 묻히기를 반복한다.

자꾸 의식으로 올라와서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나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어야 한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거다.


내 가슴속에서 이렇게 아직 장례를 치르지 못한 이들이 벌써 몇인가.


그래서 이제 난 웬만하면 장례식은 반드시 가려고 노력한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를 '부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를 사부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만큼 낯이 두껍지는 못했다.

그분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분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그 집의 살림과 세간을 속속들이 보고 느끼고

마당에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가끔 질문을 받으면, 난 문어체로 말하는 사람이라 적잖이 당황하셨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었다. 눈에 띄는 한 명이고 싶었다.

그러나 글 잘 쓰고 예쁘고 견고한 자기 세계를 자랑하는 수많은 제자들에게 그는 늘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건방져서 대하기 꽤 거북하기도 했고.


한 번인가 두 번

그가 내게 덕담을 건넨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 기억을 더듬으니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잘 다듬으면 다이아몬드가 될 거라고. 그 잘난 동기들 앞에서.

누구한테라도 할 수 있는 얘기이긴 한데, 내겐 꽤 특별한 기억이다.


직장 다니면서 힘들 때

아무 기대하지 않고 넋두리를 길게 써서 징징대는 문자를 보냈는데

곧바로 답이 왔다. '힘!'


그 짧은 한 마디에 깊은 울림이 있었다. '힘내'하면 팔짱 끼고 관전하면서 립 서비스하는 감이 있는데 '힘'하면 안수 기도 혹은 기치료받는 느낌이랄까. 지금 난 누군가에게 주제넘지 않으면서 응원하고 싶을 때 그분처럼 짧게 '힘'이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숙제도 잘 안 해오고

모임 참석도 뜸해지다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중간에 어려운 일 있을 때 걱정하는 마음에 메시지를 많이 보냈는데 '마음이 힘들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했던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분의 이름이, 짧은 연이, 존재 자체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혹여 내가 그분에게 누가 될까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 뭐하는 사람이야?' 했을 때

답할 수 있는 내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그 겨울

그 봄

그 여름

그리고 가을


한참을 걸어 올라갔던 눈 쌓인 산길

물소리 졸졸 들리던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산길

잔뜩 겁먹은 새가슴에 따라붙은 작은 날파리 하나 의지하여 오르내리던 길.


수업을 기다리며 배회하던 산책로 고 매웠던 공기

첫 만남에서 접했던 흰 옷과 길게 땋아 내린 머리

수업 마친 일요일 아침 모처럼 다 데려가 춘천에서 사주신 막국수. 막국수에는 노란 연겨자를 쳐야 한다고 하셨다.  


지금 우주 어디쯤 계시려나.

혼백은 아직 그 산속을 거닐고 있으려나.




살아생전 찾지도 않고

아니 찾아볼 낯이 없었고

이제 와서 장례식에 간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가지 않고는 그분의 부재를 받아들일 길이 없었다.

안 그래도 며칠 전 한 번 다녀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


그래 작품에서 그는 살아있는 거라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는 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헛된 인식을 품고 살 수는 없기에.

부고 소식 듣고 가보지는 못하게 생겨서 마음으로 앓다가

나 나름 장례의식을 치르고자 했다.




첫 만남 이후 선생님이 쓴 모든 책을 읽고도

난 아직도 그 문학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대단한 골수팬도 아니고 여전히 스스로 '사부님'이라 부를 자격이 있는가 의심스럽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사부님이라고 부를 특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채 하지 못한 말 있지만

그건 선생님이 날 기억할 때 의미가 있지. 과연 날 기억하실지 확신이 없다.


혹 기억하신다 해도

그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 아실 것만 같다.


그저 나 선 자리에서 계속 글을 쓰는 게

선생님이 널리 베풀었던 은혜로운 뜻에 대한 보답일 것 같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도 없고 공짜도 없으니

꼭 갚아야겠다. 춘천에서 사주신 막국수마저도.


갚고 나면, 언젠가 사부님이라고 부를 낯이 생길지 모르겠다.



유명세에 비해 너무나 평범했던 오히려 단출했던

시간의 허리를 매어 쓰던

홀로 주무시지 못했던. 무시로 웅크리고 새우잠을 청했던 선생님.


내 선생님.


그리던 어머니 품에서,

평안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