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울민트 May 09. 2022

당신이 무례한 이유

1940. 12. 병원 / 윤동주


‘어디 사세요?’

‘한 달에 얼마 벌어요?’

‘전공은 뭐예요?’

‘부모님은 뭐하세요?’ 등등 초면에 아무렇지 않게 질문한다. 조금 돌려 말할 수도 있지만 결국 소득, 학력, 재산 등 상대의 배경에 대한 관심이다.


질문을 통해 상대 파악을 마친 후 그를 환대할지 박대할지 정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은 이에게 엮여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수 없기에, 상대방 배려 없는 오로지 본인의 필요에 충실한 질문을 쏘아댈 수 있다. 그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못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즉시 내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을 최대한 좋게 보이려 노력한다. 과장하고 부풀려 말하고 심지어 거짓말한다. 이력서를 조작하고 경력을 꾸며 대고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한다.  

마음이 여린 이들은 심한 압박감에 병을 얻기도 한다.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영혼을 옭아맨 탓이다. 사회 공포증, 대인 기피증 등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겪는다. 중요한 면접이나 발표를 앞두고 정신과 약을 처방받는 일도 더 이상 드물지 않다.


없는 데 있는 척

작은 데 큰 척

힘든 데 여유로운 척


척, 척, 척은 기본이다. 사회적 동물로서 적당히 ‘척’해야 상대의 호감을 얻어 대화의 물꼬를 틀기 쉽다.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거나 우위에 서서 '스탠더드'에 더욱 근접할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



나 자신으로 살기가 참 어렵다.

대개는 끊임없이 노력하여 나이상의 내가 되어야 사귈 가치 있는,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다. 노력한다고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추구하는 '스탠더드' 삶이 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들어가 돈 벌고 명품 수집하고

집 사고 땅 사고 건물주 되고 해외여행 가고 미용 성형하고 여가와 레저를 즐기고 고급 실버타운 들어가...


그 표준을 쫒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다.

그 기준에서 뒤처지면 열등한 인간이다.


사회적 존재라면 누구나, 스탠더드를 기준으로 평가되고 대접받거나 괄시당한다.  




스탠더드에 비추어, 별 볼 일없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 그저 그런 인간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실수하고 서투르고 가끔 한심한 진짜 ‘나’는 꼭꼭 숨겨두고 사회적 자아 '부캐'를 내세운다. 본인이 속한 사회에서 좋아할 만한 요소들로 주렁주렁 치장한 제2의 자아. ‘스펙’으로 무장했다거나 실력으로 ‘날렸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알린다. 얼마나 성공했고, 인정받고, 사랑받았는지를.


진정한 자신 ‘본캐’는 셔츠 속 깊이 꾹꾹 눌러 었다가 집에 와서 벨트 풀 때 푼다. 가끔 수면 마취 중에, 술 취해서, 혹은 매우 화가 났을 때 본캐가 나오기도 한다.

직장 동료, 사업 파트너에게 본캐를 보이는 일은 결코 없다. 보이더라도 필요에 의한 선택적 계산적 노출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집에서 노령의 어머니가 성인 자녀에게 ‘박사’‘검사’‘사장’ 등 직위로 부르는 걸 봤다. 사실 좀 끔찍하다.

그는 집에서마저 벨트를 풀지 못한다. 방귀도 화장실에서 뀌어야 한다.




그냥 두면 평범한 행복과 여유를 챙기며 평범한 학교에 가서 평범한 일을 하며 살 사람들이 99%다. 그런데 지금은 이 평범함조차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다. ‘스탠더드’ 하나만 바라보고 쭉 가도 평범할까 말 까다. 다양한 성공 모델을 탐색하고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냥 생존이 문제가 아니라 ‘스탠더드’에 합치해야 사회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


문은 하나인데 두드리는 사람은 수천, 수만 명.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대다수다. 수천수만 통의 이력서를 썼지만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수천수만 명의 젊은이에게는 그냥 위로가 아니라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정신과를 찾는 이들이 점점 더 늘고 있듯이. 정신의 고통은 종종 육신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윤동주 시인은 생전 자신의 작품 중 <병원>이란 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병원이라고 봤단다.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 나뭇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1940. 12.   병원 / 윤동주                                       


슬퍼도 울면 안 되고

아파도 아프면 안 되니까

진통제 힘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코미디 프로그램

커피, 술, 담배

맛집

명품 쇼핑

음험하고 문란한 활동 등


그러다 너무 힘들면 아예 신경을 제거하여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눈물이 나지 않고

아픈 줄 모른다. 속은 다 썩었는데.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한다.

네가 힘든 건 당연한 거라고.


‘가장이 원래 그런 거지.’

남의 돈 먹는 게 그렇지


그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진통제 한 알 주면서 계속하라고 한다.


그래서 척을 멈출 수 없다.

본캐와 부캐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고통은 증가하지만

오늘도 스탠더드에 맞게 사회적으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

진통제 주워 먹고

피에로 같은 부캐를 열심히 돌리고 있지 않은가.



차마 피에로 눈 속을 들여다볼 엄두는 나지 않지만 -

어딘가 금잔화 한 포기가 있다면  

서로의 가슴에 꽂아줄 용기가 필요하다.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보지는 못하더라도.


 

매거진의 이전글 잠깐 멈추어 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