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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민트 May 26. 2022

나는 왜 카페가 불편할까

서비스 직원이 달라졌다

손님은 왕이다?

아니다. 손님이랍시고 식당 카페 상점 등 남의 사업장에서 눈 뒤집고 갑질 해도 좋은 시대는 지났다.

이제 서비스 직원이 갑이다.


이런 변화는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갑질하는 서비스 직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일화를 심심찮게 접한다. 동조하는 의견도 압도적이다. 예전에는 어쩌다 한 번 겪는 특이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일상에서 비교적 흔히 겪는 일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주머니에 돈 있다고 무례하게 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기분 좋게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으면 내가 먼저 그들을 기분 좋게 해줘야 한다. 사실 할 수 있으면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얌전히 있다 돌아가는 편이 낫다.




기존 서비스 업계를 지배했던, 올드하지만 여전히 일부 유효한 '손님은 왕이다'로 대표되는 굴종적인 서비스 정신은 그간 저열한 황금만능주의를 부추긴 면이 있다. 일명 '돈 있으면 다야'주의 혹은 '금전 복종 주의'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과거 조선시대 며느리에게 요구했던 덕목 '눈이 있어도 못 본 척,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 입이 있어도 말 못 하는 척'을 21세기에, 놀랍게도 서비스 직원에게 요구했다.


조선시대 며느리는 표현할 권리가 없었다. 자기 생각이 있어도 말할 수 없고, 오로지 시댁이라는 남성 권력에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손님의 갑질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그런 면에서 요즘 서비스 직원이 갑질하는 분위기는 반가운 면이 있다.




시대가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졌다.

이제 서비스 직원은 예전처럼 친절하지 않다. 낡은 사고방식으로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친절을 기대하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일 것이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설사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손님이라도 막무가내 고성과 막말을 퍼붓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입장과 서로 다른 관점이 카운터 사이로 팽팽하게 맞선다.


음료 한 잔을 두고,

아르바이트생과 손님이 알듯 모를 듯 기싸움하는 게 지금 우리 대부분이 일상에서 흔히 겪는 촌극 아닌가.


그러나 누구라도 아무 잘못한 것 없이 돈 쓰고 기분 나쁜 경험 할 이유는 없다.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서비스 직원을 보호하는 것은 좋지만, 정도가 지나쳐서 오히려 서비스 이용객을 보호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누가 갑질을 하네마네 대립하기를 멈추고  

서비스 직원과 이용객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때이다.

오늘날 서비스 직원의 정의, 제공하는 서비스의 조건과 한계, 서비스 직원과 이용객 사이 매너 등을 한 번 정비할 필요가 있다.




서비스 직원은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굳이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에게도 인격이 있다는 의미이다. AI 로봇이나 주문 기계가 아니다. 아무리 서비스 매뉴얼대로 손님을 대하더라도 그들은 상처받을 수 있는 인간이다. 당신 역시 인간이라면 돈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기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용객 입장에서는 당연히 서비스 직원의 친절도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내가 낸 커피값에 서비스 이용료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커피 한 잔을 위해 지불한 만원에는, 커피 맛뿐 아니라 더 나은 서비스에 대한 바람과 욕구가 있다.


따라서 저가 커피 주문하면서 고가 커피 서비스를 기대하는 것은, 모텔 가서 특급호텔 대우를 요구하는 것만큼 상식적이지 않다. 본인이 주문한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자유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낸 돈이 친절에 비례하지 않고, 내가 낸 돈이 꼭 친절을 담보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내가 평균보다 더 지불했다 해서 친절하리라는 법은 없고, 반대로 상대적으로 덜 지불했다고 해서 불친절한 게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오천 원짜리 국밥을 먹어도 기분 좋은 근사한 경험이 될 수 있고, 십만 원짜리 코스요리를 먹어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 될 수도 있다. 돈 많이 준다고 깍듯하게 대접하고, 돈 적게 준다고 본체 만 체하는 게 정당하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돈의 노예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어떤 직원은 자신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불특정 다수 손님에게 본인이 서비스 직원으로서 지금껏 받았고 앞으로 받을 모든 서러움을 계산하여 앙갚음하듯 대한다. 사람에게 앙심을 품은 이가 사람을 대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지 않다.


그냥 차갑고 건조한 태도를 가졌다기보다 누가 봐도 사람을 싫어한다는 인상을 준다.

손님은 매우 황당하고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니 해당 업장을 두 번 다시 찾지 않는다.


어떤 손님은 업무 스트레스 혹은 육아 스트레스를 엉뚱하게 매장 나와서 풀려고 든다.

단순히 큰돈을 쓰거나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는 게 아니라 신경질을 부려서 풀고자 하니 문제가 된다.


'서비스 직원은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이 못된 시어머니처럼 굴어도 꼼짝 못 할 것이라 기대하고는 부당하고 폭압적인 방식으로 서비스 직원을 대한다. 그는 그게 '못된 시어머니'가 아니라 '못난 찌질이'짓일 뿐임을 모른다.


개중에는 일부 서비스인으로부터 겪은 불쾌한 경험으로 인해 전체 서비스인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설정하고 일부러 하대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다.


양측이 각자 그런 식의 나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서로 물고 물리는 악순환을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서비스 직원도 카운터를 나서면 다른 매장에서 손님이 된다.

서비스 직원이, 손님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상처 입은 사람이 문제다.




상처는 반드시 치료해야 하고, 스트레스는 건강한 해소 방법을 찾아야 한다.


왜 차 한 잔 놓고

밥 한 그릇 두고

뜻하지 않게 비인격적 대우 혹은 불친절이라는 나쁜 경험을 하고, 기분에서 그치지 않고 영혼까지 상하냐 말이다.


내가 귀하면 그도 귀하다.

그가 귀하면 나도 귀하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하라'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관계 황금률은 이 시점에서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누구든 좋은 대우받고 싶다.

집, 직장, 백화점, 동네 마트 어디서든 존중받고 싶다. 그도 나처럼, 나도 그처럼.




서비스 직원이 손님에게 도를 지나쳐 갑질하고 있다면

손님이 서비스 직원에게 심하게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은 아픈 것이다.


나를 '존중해달라'는 요구를

불친절한 응대로 표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고 싶다.


자신의 가치를 상대의 얼굴에서 찾다 보니

상처를 입기도 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이상한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는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나온 카페는 그를 비추는 유일한 사회다.

또한 하루 종일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카페는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단 하나뿐인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외로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기계보다 못한 수많은 까칠하고 딱딱한 얼굴 가운데  

내 웃는 눈을 보고 기분을 넘어 영혼에 활기를 얻고,

내 공손한 행동으로 위로받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내가 조금 더 건강하다면,

내가 조금 더 사람을 대할 줄 안다면


먼저 선대 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서비스 정신이 다른 게 아니다. 매너가 특별한 게 아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게 서비스 정신이고, 존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매너이다.


사회 곳곳 울분을 내려놓고 갑질을 멈추고,

설사 갑질하더라도 조금 이해해주고,

존중과 환대의 문화가 주류가 되는

선순환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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