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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민트 Sep 04. 2022

지비츠가 부른 악몽

가히 악몽이었다


푸우가 갑자기 멈춰 서서 무언가 골똘히 살펴봤다.

남의 신발이었다.

c록스라는 구멍 송송 뚫린 신발. 밋밋한 외피에 알록달록 눈길을 끄는 화려한 배지들이 빼곡히 붙어있었다.


지비츠라고도 하고 파츠라고도 하는 장식물. 그게 좋아 보였나 보다.


가끔 장 보러 가서 '엄마 저것 봐.''나 이거 갖고 싶어'했던 그거.

그때마다 '실내화 바꿀 때 되면 사줄게'했는데

마침내 때가 되었다.

 

개학 전날 실내화를 들여다보니 밸크로 끈이 떨어져 덜렁덜렁 겨우 붙어있는 게 아닌가.

당황하면서도 장식할 수 있는 실내화 사주기로 한 게 생각나서 조금 설레었다.




막상 사려고 보니 가격이 좀. 당연한 얘기지만 예쁜 장식물은 더 비쌌다.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불 들어오는 LED 장식물은 개당 오천 원이 넘었다.  

다행히 그건 아이가 한 개만 하겠다고 했다. 휴.


유아 실내화라 면적이 넓지 않다. 축구공, 축구화, 축구 클럽 문양, 비행기, 토끼, 우주선. 총 여섯 개의 장식물을 달고 나니 실내화 표면이 꽉 찼다.

뿌듯하다. 그런데 요 녀석이 갑자기 집에서 신겠다고 한다.

이 예쁜 걸 왜 집에서 신냐고, 학교 가져가라 하고 산뜻하게 새 학기를 시작했다.



사흘도 되지 않아

푸우가 민머리처럼 허연 속살이 드러난 실내화와 장식물 일부를 들고 왔다.


"무슨 일이야?"


- 나머지는 OOO이 뺏어갔어.


"뭐?"

"그럼 달라고 해야지."

 

- OOO이 하나를 xxx한테 줬어.


"안된다고 했어?"

- 했는데 듣지 않았어.



속에서 열이 올라왔다.


애미 애비 닮아서 천성이 순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푸우가

당하고 온 건가 싶어서.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랬다. 난 순둥이였다.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양보하는 아이. 정말 많은 아이들이 선을 넘나들었고 일부는 웃으면서 괴롭혔다. 내게는 방패막이 없었고 구세주도 없었다.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괴롭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있었다. 그게 문제인 줄도 몰랐고, 내가 오롯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고통받는 일이었다.


난 사랑을 잘 모르지만 내게 사랑이 있다면 그건 '보호'일 거다. 난 푸우를 멋모르는 정글의 아이들로부터 보호하고 싶다. 실제 법적 보호자이기도 하고.




담임교사에게 연락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가장 먼저 돌아오는 답이 'OOO는 (다른 아이 물건을) 뺏어갈 아이가 아닙니다.'였다.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편향된 태도를 보이니 불길했다.


그도 그렇게 말한 것에 문제가 있고, 내 입장에서 불쾌할 수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는지 웃으면서 얘기했다. 웃기지도 않은 얘기를.     


다음날 오후 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얘길 해봤는데 OOO은 '모른다''기억이 안 난다'라고 합니다.

XXX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런 일이 없답니다."


다시 교사는 예의 어제의 그 태도로 웃으며 말했다.




뜨거운 것이 명치 아래서부터 올라왔다.

그럼 우리 푸우가 헛소리를 했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인가.


교사는 그 아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듯 말하고,

푸우의 얘기가 진실일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했다.  


푸우 말만 듣고 상대 아이들을 쥐 잡듯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교사의 태도를 보면, 그 아이들 말은 진실이고 푸우 말은 거짓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사실을 말한다면 푸우도 사실을 말할 가능성이 있고,

푸우가 거짓을 말한다면 그들도 거짓을 말할 가능성이 똑같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교사는

'OOO이 뺐어갔어.' 'OOO이 XXX에게 준 것도 분명히 맞아'라는 푸우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그저 상대 아이들 반응을 전하면서

'그럴 아이들이 아니다.'

'그 아이들이 푸우와 가장 친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교사는 이 일이, 아이들이 노는 과정에서 발생한 단순 분실 사건으로 무마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기울어진 처신 덕분에

꼼짝없이 푸우만 그 친하다는 친구들을 모함한 '나쁜 아이'가 되어버렸다.




교사가 '어머님이 지비츠 때문에 많이 속상하신 거 같다'며 자꾸 교실 어딘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찾아보겠다는데 완전히 잘못짚었다. 지금 장식물 잃은 게 문제가 아니다.


한쪽 입장은 헤아리지 않고

다른 한쪽 아이들만 두둔하며 사건을 은폐, 축소하기 급급한 교사의 태도와

가장 친하다는 아이들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고, 그 말이 진실처럼 굳어지며, 되려 '나쁜 아이'가 되어 억울함을 느꼈을, 그게 억울한 건지도 모르고 아플 푸우가 아프다. 지비츠 잃은 게 대수인가. 벌써 얼마나 그보다 더한 것을 잃었나.   


아픈 마음에 푸우에게

'선생님이 네 말을 믿지 않아.'

'그러니 누가 네게 해를 입히면 큰 소리로 알려서 모두가 알게 해야 해.'

'증거나 증인을 확보해야 한다고.'




알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푸우가 울먹이며 방을 나갔다.


일부러 붙잡지 않았다. 위로하지도 않았다.

맘에 들지 않아도 이게 현실이니까. 신뢰할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는 건 인지상정이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증거와 증인을 둬야 한다는 걸 아는 건 중요하니까. 아프지만 현실 자체가 아파서, 더럽지만 현실 자체가 더러워서 어쩔 수 없다.




교사에게 묻고 싶다.

푸우 말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푸우가 받을 상처는.


똑같이 증거가 없고, 증인도 없는데

왜 푸우 말만 결과적으로 거짓이 된 건지.


교사가 개입하여, 진실과 상관없이, 자기 의도대로 상황을 끌고 가면서

억울한 아이를 만드는 게 과연 교육적인지.


교사의 공정하지 않은 개입으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면

이런 경험을 발판 삼아 아이들은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갈까.




"OOO와 더 이상 놀지 않을 거야."


푸우는 이 사건을 결코 '지비츠 분실 사건'으로 기억하지 않을 거다.

같이 놀던 아이들이 신발 위 반짝이던 보물을 뺏어갔는데, 그들이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하고, 선생님은 부당하게도 편파적으로 그 일을 다뤄서, 피해 입은 본인이 되려 거짓말로 친구들을 모해한 아이로 남은 악몽. 쓰디쓴 배신의 경험.


목소리 작고 순한 자신이 억울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사진을 찍든, 일기를 쓰든 기록을 남기고 어떻게든 큰 소리로 대응하여 최대한 증인을 둬야 한다는 씁쓸한 교훈.


권위 있는 존재가 공명정대하지 않을 수 있으니 스스로 앞가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면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으로 그보다 더한 '교사치'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일곱 살에 조기 교육한 셈 치자.

악몽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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