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까기 인형

사전 지식 없이 관람한 [발레]

by 소울민트

아이가 학교에서 호두까기인형 발레곡을 듣고 와서 갑자기 공연 보러 가자고 했다. 급하게 알아보니 죄다 매진인데 다음날 또 얘기하기에 다시 찾아봤다. 딱 두 자리 떠서 얼른 예매했다.


바깥양반 팽개치고 저녁에, 평소라면 느긋하게 취침 준비할 시간에, 서울에서 추운데 애 데리고, 차 끊길까 동동거리며 귀가할 생각 하니 잔뜩 긴장되었다. 밤 택시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 그나마 지하철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발레였다. 평생 볼 일 없을 것 같은.

공부 좀 하고 갈까 하다가 '아무 기대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났다. 사전 지식 없이 보이는 걸 보는 것도 다시는 할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니까.


- 오페라글라스가 있어야 표정이 보였다. 대사 없이 음악과 춤으로 진행되는 공연이므로 표정을 못 보면 많은 걸 놓치는 거겠더라. 내 자리는 전체적 조망에 좋았지만 왜 대체로 앞 좌석이 비싼지 수긍했다.


- 무대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인형 빙글빙글 도는 오르골이 실은 발레 무용수의 움직임을 재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팔은 하늘하늘하고 몸은 가볍게 들어 올려지고. 마른 몸으로 쉴 새 없이 회전하고 점프하며

그 모든 동작을 소화하다니 대단하게 느껴졌다.

식단을 고도로 제한하면서도 고난도 동작 수행하기 위한 근육은 붙여야 하고. 평소에 어떻게 훈련해 온 걸까 가늠하기 어려웠다.


- 가녀린데 탄탄했고 탄탄한데 무겁지 않았다. 공연을 올리기 위해, 저 정도 기량을 보이기 위해 무대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절제하고 연습하고 훈련해 온 건지. 근육에 깃든 인고의 시간에 대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 주역이 단연 으뜸이겠지만, 군무마저 나무랄 데 없이 빼어났다. 누가 주역이라 그래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무용수들이었다. 모든 무희 얼굴이 웃는 표정이었던 게 인상 깊다.

- 공연 전 스마트폰 끄라고 했지만 막이 내리자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어쩜 그렇게 빨리 폰을 꺼내 들고 있는지. 공연 내내 금기시되는 물품인 스마트폰을 마침내 응원봉처럼 들고 들썩이며 촬영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 다신 안 볼 거라 예상했지만 또 볼 것 같다. 다음 해에는 공부하고 봐야지. 특히 음악.


호두까기 인형 제작진님들, 11일간의 공연이 오늘부로 막을 내렸군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름다움과 순수, 낭만을 세상에 공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이에게 기쁨 준 만큼 행복하고 건강한 연말연시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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