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맘카페에 올라온 이 질문에 댓글이 쏟아졌다
나 : 16주면 이제 성별도 알 수 있어요?
의사 : (초음파 화면 들여다보며) 확실하진 않아요
나 : 네... (실망)
의사 : 음.. 다리 사이에 뭐가 있네요
나 : 허걱 (뭐가 있다...!)
의사 : 아빠 닮은 아기예요~
나 : 와 우와 와 (내적 비명 10초간 발사)
(우리나라에선 32주 전에 태아 성별을 알려주면 불법.
의사쌤이 성별 알려준 거 아니에요~
다리 사이에 뭐가 있다고 이야기했을 뿐!)
진료 내내 계속 뜻모를 웃음이 나왔다.
마침내 모든 진료가 끝나고 몹시 궁금한 얼굴의 태호와 마주했다.
태호 : 성별 알았어?
나 : 응 (표정 관리 중)
태호 : 아들이야?
나 : 어떻게 알았어?
태호 : 웃는 거 보니까 아들 같더라. 와... 아들이네
나 : 그러게. 우리 일단이 아들이네
태호 : ...
나 : ...
태호 : 좋다. 난 아들 좋아.
나 : 응, 나도. (...)
지금도 이 날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한참 먼 곳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리던 우리.
그래, 아들도 좋지!
딸을 조금 더 기대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들을 덜 선호한 것까진 아니었다.
막연하게 두려웠다고 해야하나.
딸만 둘인 집에서 자랐고, 소속 집단에도 대체로 여자가 많았기 때문에 나는 ‘남자 아기’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자라면서 대화도 줄고, 딸처럼 가깝게 지내지 못 할 거란 아쉬움도 약간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니까, 아빠랑 수영장 목욕탕 가면 되니 편하겠네 싶다.
여하튼. 내가 아들 엄마라니! 생각할수록 도전이다.
기저귀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것 같다.
나, 아들 잘 키울 수 있을까?
우리 부부가 그러했듯 임신 16~18주를 맞이한 맘카페 게시판도 '성별'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아니지, 게시판을 보면 이미 12주쯤부터 초음파 사진과 함께 "고수님들 성별 확인 부탁드려요"라는 글이 줄줄이 올라온다.
그럼 정말 ‘고수님’들 댓글이 달리는데, 어떤 고수님은 워낙 적중률이 높아서 맘카페 유명인사일 정도다.
마침내 성별을 확인한 사람들도 저마다 소식을 전한다.
"아들 엄마 확정이요~"
"우리 아기 딸랑구래요"
성별 관련 글들엔 재미있는 경향성이 있다.
"사실 딸을 원하(했)는데"라는 말들이 많이 보인다는 것.
아들인 경우엔 이런 댓글이 자주 보인다.
"아들도 좋아요~"
오프라인 세상에서도 똑같은 반응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맘카페를 뒤흔든 글 하나가 등장했다.
'근데 왜 다들 딸을 선호하세요?'
그러게.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아들 낳으려다 딸 부잣집 된 경우가 동네마다 하나씩 있지 않았나?
(응, 그거 우리 동네)
역대급으로 댓글이 잔뜩 달렸다.
그중 다른 댓글들을 요약했다고 할 만한 댓글이 눈에 띈다.
'딸은 나중에 남편 없이도 집에 올 것 같은데, 아들은 며느리랑 안 오면 집에 안 올 것 같아요'.
이 댓글이 다른 댓글들의 '요약본'이라 느낀 이유는 간단하다.
많은 댓글이 딸과 아들의 차이뿐 아니라 사위와 며느리의 차이까지 생각해 결과적으로 딸을 선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키울 때도 딸이 좀 더 엄마와 잘 통하고, 곰살맞은 애교도 많은 데다, 키우고 나면 평생 친구가 될 수 있고,
결혼하고 나면 며느리 눈치는 봐도, 사위는 편하게 느껴져 오래오래 딸과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
이 와중에 아들이 더 좋다는 예비맘 댓글도 흥미롭다.
'아들이니까 최대한 빨리 독립시키게요. 남편이랑 둘이 오붓하게 시간 보내고 오히려 편할 것 같아요!'
딸과 아들이 이렇게도 다르게 받아들여지니, 잘 보이지도 않는 12주 초음파 사진을 올리며 감별을 애타게 요청하는 것일 테다.
딸인지, 아들인지에 따라 앞으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거라 생각하니까.
정말 그러려나?
일단이는 아들이니 더 독립적으로 키우고, 며느리 없이 아들 얼굴 보는 건 포기해야 하나?
일단이가 딸이었어도 독립적으로 키우려 했는데.
아들이어도 애교 많았으면 좋겠는데.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데.
문득 친구 J가 떠오른다.
나보다 3달 앞서 임신한 J.
J는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이를 남/여라는 성별에 미리 가두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시 댓글들을 살펴본다.
딸이 원가족과 더 가까울 거란 기대든, 아들은 얼른 독립시키면 되니 좋다는 생각이든 오래된 고정관념 안에 있다.
얼핏 보면 시대가 바뀌어,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도 부모님이 “넌 딸이니까”라며 이것저것을 기대했다면 꽤 스트레스 받았을 게 분명하다.
그걸 알면서도 일단이가 딸이길 기대하며 은근히 ‘딸다운 무언가’를 원했구나 싶다. 아이쿠.
태아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두고, 너무 먼 미래까지 점치고 규정짓지 않는다는 건 아이와 부모를 여러모로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딸처럼’ 키우려 애쓰지 않고, ‘아들처럼’ 자라려고 스트레스 받지 않는 길.
게다가 어떤 아이든 자라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할 수 있다. 스스로를 '여/남' 경계 없는 '논 바이너리'라 여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사회는 남/여라는 견고한 틀에 아이를 끼어 맞추고 싶어 할지언정 나만큼은 아이 자체를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성별 상관없이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내가 아이의 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더욱더, 단순히 다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이니까’에 맞춰 미래를 생각하는 걸 자제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예비부모들이
유독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해하고,
미래의 며느리와 사위까지 점쳐보며
아들이 낫네, 딸이 낫네- 이야기하게 되는 건
아마도 아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실재하지 않은 아기를 두고,
예비 부모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그러다 '아들'이라는 단어, '딸'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면
그간 익숙하게 접해온 성별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아이를,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점쳐보게 된다.
막상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개념들은 힘을 상당히 잃을 것이다.
아이는 세상에 하나뿐인 생김새와 개성으로 존재감을 빛낼 것이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아이를 설명하는 제일 중요한 단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들이어서 이럴 거고, 딸이라서 저럴 거라는 기대와 걱정은 되도록 하지말자.
무엇보다 우리 일단이가 살 세상은 이런 틀에서 좀 더 자유로웠으면 좋겠으니까.
일단이 이름을 고민 중이다. 국적에도, 성별에도, 유행에도 얽매이지 않은 이름으로 하고 싶다.
여담)
아들만 둘 키운 우리 시어머니.
한 번도 티 내지 않았지만 은근히 딸을 기다리셨다.
일단이가 아들이란 걸 전했을 때 반응이 너무 재밌었다.
껄껄.
일단대디 : 엄마, 일단이 아들이래요. 좀 아쉬운가?
시어머니 : 무슨! 어차피 아들이든 딸이든 효도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