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예정일에 나오는 아기는 5%밖에 안 된다 했던가.
깜깜무소식인 우리 일단이. 엄마에게 자유 시간을 조금 더 주고 싶은 모양이다.
돌아보니, 임신 기간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생각보다 견딜만 했다. 한 마디로 미리 짐작하는 게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해온 어떤 경험과도 달랐고, 아마 다시 겪을 일도 없을 것이다.
몸은 생소한 증상들로 힘들었지만
사람과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커지는 즐거움도 있었고,
어디서 보고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태아와 연결돼 있는 느낌은 굉장히 오묘하고 벅찼다.
적어두지 않으면 두고두고 아쉬워 할 평생 잊지 않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중 3가지를 적어둔다.
1.
2021.05.18
엄마가 최근에 아주 생생한 꿈을 꿨다며 이야기해줬다.
내가 아기였던 시절이었는데 바로 어제처럼 생생했다고.
엄마의 꿈은 아빠가 나를 안아 재우고 있는 걸로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던 엄마가 문득 방 문을 여니 내가 누워서 자고 있더란다.
곤히 잠든 걸 보고 엄마는 내 배에 수건을 가만히 덮어줬고,
조용히 방을 나와 아빠에게 “우리 딸 잔다~”라고 속삭였단다.
어린 내 얼굴이 너무 생생해서 꿈이 아주 신기했단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주륵 흘렀다.
첫 아이를 낳고 가만가만 잠을 재우고 깰까봐 속삭이고
육아의 기쁨과 힘듦으로 하루하루가 꽉 찼을 젊은 부모님의 모습과
그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어린 나와
그 사랑이 새삼스레 하나하나 와닿는, 이젠 다 커서 출산을 앞둔 내가 전부 애틋하다.
2.
2021.05.28
23주가 되니 배가 놀랄 만큼 많이 나왔다. 커진 배를 쓰다듬으며 일단아, 불렀다.
로션을 바르면서 “일단아 사랑해~ 엄마가 일단이 많이 사랑해” 라 말했는데 눈물이 왈칵 흘렀다.
나를 ‘엄마’라 부를 때마다 내가 평생 ‘엄마’라 불러온 나의 엄마가 겹쳐진다.
일단이에게 사랑한다 말하며 내 몸 구석구석 로션을 바를 때면 내 몸의 아주 작은 시절,
엄마가 소중하게 품었다가 귀하게 세상에 내놓고 키워온 세월이 겹쳐진다.
혼자 있지만 엄마와 일단이, 과거와 미래가 이 순간 함께한다.
벅차오르는 감정 때문에 눈물이 다시 한번 왈칵 쏟아진다.
3.
2021.06.15
일단대디와 여행 마지막 장소인 거제 능소몽돌해변을 걷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그동안 여행을 몇 번 했을까?
하나둘 손꼽아보니 이번 여행까지 19번. 연애 4년, 결혼 4년 더해 8년간 많이 다녔다.
20대 초반에 처음 만나, 20대 후반에 연인이 되었고, 30대 후반을 눈앞에 둔 우리.
연애를 시작할 무렵 우린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취준생이었는데,
이제 곧 한 아이를 돌봐야 할 육아 동지가 된다.
둘이 훌훌 자유롭게 떠나는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신체적 나이로든, 사회적 나이로든 훗날 ‘젊은 시절’로 기억될 나날도 지금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푸릇한 20대에 만나
치열한 30대를 함께한 우리가
이젠 '부모'라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뭉클해졌다.
눈시울이 붉어진 서로를 꼭 안았다가, 아침 바다를 나란히 한참 바라보았다.
*9월 22일이 출산예정일이었던 일단이는 이틀 뒤인 24일 태어났습니다.
산후조리와 육아로 혼이 다 빠진 바람에 글쓰기를 이어갈 수 없었어요.
한없이 행복했다가도 한없이 좌절스런 나날들입니다.
최소한의 산욕기(8주)도 지났으니, 어떻게든 글을 다시 써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출산예정일에 적어둔 글을 퇴고하는 것으로 시작해,
미치게 힘들었던 출산 후기와 엄청난 번뇌를 안겨준 모유수유,
신생아와의 나날에서 느끼는 것, 배우는 것을 적으려 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글을 발행하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