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가 직접 기록해본 '뜻밖의 결과'
임신 초기 무렵 '신생맘'들이 맘카페에 자주 올리는 주제, '임산부 좌석'. 열에 아홉은 앉아본 적이 없다는 하소연이다. 주변인들도 염려스런 얼굴로 묻곤 한다. "임산부 석은 양보 좀 받아?"
언론에 종종 보도되는 임산부 폭행 사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불만, 임신 기간 내내 자리 양보 받은 건 서너 번 뿐이라는 주변 경험담까지.
임산부가 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여성이 임산부 좌석을 양보받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내려놓는다. 기대는 커녕, 혹시 해코지라도 당할까 싶어 인상 사나운 남성이라도 앉아 있으면 일단 방어벽을 한껏 세운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있었다. 임산부 좌석에 앉은 50대 추정 남성. 눈이 마주치자 빙글 웃었다. 본능적으로 임산부 뱃지를 숨겼다. 서있던 위치도 옮겼다. 누가 봐도 임산부로 보이는 임신 중기(25주) 때 일이다. 그는 한참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있다가 유유히 지하철에서 내렸다.
이쯤되면 역시 남자들이 문제군, 이라 생각하기 쉽다. (이런 식으로 불붙은 '남녀 분쟁'이 얼마나 많은지!) 하지만 적어도 내 경우엔 남과 여 둘 중 특별히 더 친절한 집단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임신 내내.
2021.04.08(16주)
임산부 좌석이 아닌데 자리를 양보받은 세 번째. 이번엔 젊은 남성분. 아마 30대. 처음 양보 해준 분은 30대 여성분, 어제는 40대 쯤의 남성분.
오히려 임산부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나 젊은 여자는 내가 앞에 있어도 양보해주지 않았다.
새삼 이분법적으로 손쉽게 갈라 치는 건 폭력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순간에도 맞은 편 양 끝 임산부 좌석에 절대 임산부일 리 없는 나이든 여성과 (임산부 뱃지 없는) 젊은 여성이 앉아있다. 둘 다 눈을 꼭 감고.
내친 김에 임신 후기에 접어든 27주차부터 출산휴가가 시작된 34주 전까지, 출퇴근 길 상황을 본격적으로 기록해봤다. (7월 중순부터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격상으로 재택근무한 날 제외)
0624.
출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었음.
퇴근: 5호선 임산부 자리 다 차있음. 다른 자리 양보해준 회색 재킷의 40대 추정 남성 분.
0625.
출근: 5호선 임산부 좌석 할머니 착석. 다른 자리에 앉음
약속 장소 이동: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서 착석.
귀가: 6712. 일반석 양보해준 30대 추정 여성 분.
0628.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었음
0629.
출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었음
퇴근: 5호선 임산부 좌석 70대 추정 남성, 40대 추정 여성 앉아있음. 50대 추정 남성이 다른 자리 양보해줌.
0630.
출근: 임산부석 비어져 있음
퇴근: 임산부석에 30대 추정 여성 앉아있음. 뱃지 없음. 옆자리에 있던 40대 추정 여성이 양보해줌.
0701.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음
0702.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음(심지어 지하철 사람 엄청 많은데! 감동)
0705.
출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음
퇴근: 5호선. 임산부 석에 임산부 앉아있음. 4050 추정 여성이 다른 자리 양보해줌.
0706.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 좌석 비어져 있음. 다른 임산부 석은 50대 추정 여성이 가방 자리로 쓰고 있음.
0707.
출근: 5호선. 임산부석 80대 추정 남성 앉아있음. 반대쪽 임산부석에 앉음
퇴근: 5호선. 임산부석 40대 추정 여성 앉아있음. 반대쪽 임산부석에 앉음.
0708.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석 비어져 있음
0709.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석 비어져 있음. 다른 쪽은 50대 추정 여성 앉아있음.
0729.
출근: 5호선. 임산부석 한쪽 비어져 있음. 다른 쪽엔 20대 남자 앉아있음
퇴근: 5호선. 임산부석 40대 추정 여성 앉아있음. 다른 쪽 끝에도 40대 추정 여성 앉아있음. 둘 모두 임산부 뱃지 없음. 그 옆자리 20대 여성이 나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양보해줌
0802.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 석 비어져 있음, 다른 한쪽은 20대 남성 앉아있음
0805.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석에 임산부 앉아 있음, 다른 쪽 끝 비어 있어서 앉음.
0806.
이동: 5호선. 임산부석 한쪽은 임산부, 한쪽은 50대 여성 앉아있음. 다른 자리 40대 추정 여성분이 양보해줌.
0809.
출근: 택시
퇴근: 5호선. 임산부석 40대 추정 여성 앉아 있음. 뱃지 없음. 양보 못 받아서 쭉 서서 감.
일단 임산부가 아닌데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여성 9, 남성 4, 가방 1. 여성이 두 배 이상 많았다. 연령은 20대부터 70대 이상까지 다양했다.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데도 자리를 양보해준 사람은 남성 2, 여성 5. 여성이 두 배 이상 많았다. 연령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임산부가 아닌데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여성들은 본인이 임산부로 보일 수 있다는 걸 활용하는 걸까. 눈을 지그시 감고 어딘가 뱃지가 있다는 걸 숨기듯 가방을 감싸안은 모습을 보면 이런 추측을 하게 된다. 근데 대체 왜 짐은 임산부 배려석에 올리는 걸까? 기록했던 이 시기 외에도 임산부 배려석에 가방이 앉아 있는 걸 자주 봤다.
그렇다고 이들이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냐면 그렇지 않다. 사실 임산부 배려석은 말 그대로 '배려석'이다. 양보를 하지 않는다고 벌금을 물리지도 않고, 양보를 한다고 상을 주지도 않는다.
더 솔직해지자면 나 역시 붐비는 지하철, 비어 있는 임산부 배려석을 보며 '그냥 내가 앉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 자리를 임산부에게 양보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이 기록을 시작했을 땐 과연 누가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는가, 감시해보자는 마음이 컸다. 임산부에 대한 배려와 친절을 당연히 기대했던 것 같다. 당연한 게 절대 아닌데도.
그러고보면 내 기록 중 별표 쳐서 널리 알려야 하는 게 있다면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데도 자리를 양보해준 사람, 붐비는 출퇴근 시간인데도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둔 (기록 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 덕에 임신 기간 동안 사람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가 나처럼 모자란 인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감시한다고 기록 시작했다가 분노가 솟구쳐 이런 세상에 우리 아기 어떻게 키우냐며, 좌절만 했겠지.
그래서 임신한 뒤 이 말을 가장 자주 하는 것 같다.
'인간은 경험한 만큼만 아는 법이구나. 나중에 보면 지금의 나도 얼마나 작은 인간일까.'
지하철 5호선 출퇴근길, 지난 9개월 동안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해준 분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