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사실 알았을 때 기분 어땠어요?

by 꽁치리

"임신 사실 알았을 때 기분 어땠어요?" 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답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놀라고 기쁘고 완전 신기했지!" 라며 기대에 한껏 부응해주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그때 나는.. 잠깐 놀라고 짧게 기뻤다가, 길게 우울했다.




2021. 01. 18

임신테스트기에 두 줄이 떴다. 세상에. 배란기테스트를 하자마자 성공했다. 아직 좀 믿기지 않아. 엄청 좋은 건 아니고 얼떨떨하면서 약간 두렵고 조금은 기대도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야겠지. 최대한 나를 잃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 방금 이 문장조차 낯설어.... 엄마는 권OO, 우리 엄마인데 내가 이제 엄마라니!! 하지만 임신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건 역시 부모님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뭘 찾아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병원 다녀오면 써보려고 ‘280days’라는 앱만 하나 받아뒀다. 임신 기간 동안의 변화를 기록하고 정보도 볼 수 있고 남편과 연동해서 엄마 일기, 아빠 일기를 쓸 수 있는 앱이다.


태호는 (나는 이미 보고 있었던) 육아웹툰 ‘닥터 앤 닥터’ 정주행을 시작했다. 임산부 비타민도 주문했다. 60정에 3만 7000원이라 한다. 나보단 더 설레하는 것 같다. 책임감도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2년은 내가 임신과 출산, 초기 육아에 집중해야하니 우리집 가장으로서 나와 아기를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1월 1일쯤 배테기상 배란기였기 때문에 아마 지금 임신2주차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최근 배에 가스가 잘 차고 변비가 좀 심해졌는데 혹시 임신 탓일까. 이것 말고는 아직 몸에 다른 변화는 전혀 없다.




나의 임신은 '배란기 테스트기'라는 도구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도구 덕에 배란기가 내 추측보다 무려 약 3주 늦게 올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임신 계획 있는 사람은 무조건 배 선생님을 집에 모시세요)


배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약3일의 배란기 동안 하루에 최소 한 번 사랑을 나누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사랑은 의무감으로 되는 게 아니다. 목표를 절반 정도 달성한 우리는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라는 마음과 '원래 한 번에 되진 않을 거야. 다음달에 또 도전하지 뭐' 라는 마음으로 별 기대 없이 2주를 보낸 상태였다.


너무 선명한 두 줄이었다.21.01.18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해보던 임테기. 마침내 선명하게 뜬 두 줄. 그걸 들고 태호에게 가다 '아 이건 촬영해둬야지' 싶어 얼른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으며 어색하게 임테기를 내밀었을 때 태호 얼굴에 떠오른 표정. 놀라움과 기쁨과 당혹감과 감동이 다 섞여있었다. 살짝 눈물까지 보였다. 여자가 바라는 완벽한 리액션이랄까.


태호의 반응을 보고나서야 얼떨떨하던 나도 웃음이 나고, 눈물도 살짝 났던 것 같다. 관계한 지 2주 뒤부터 확인 가능한 '얼리 임신 테스트기'를 썼던 거라, 일주일 뒤 병원에 가서 제대로 확인을 하기로 했다. 아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놀라운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 일주일, 입이 간질간질했다.



2021.01.23

병원에 다녀왔다. 아기집을 확인했다. 의사선생님의 축하드린다는 인사를 받으니 정말 실감이 났다. 임신 5주 반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양가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우셨다. 두 분의 감정은 좀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감격스런 눈물이었다.


엄마가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났다. 나는 임신이 전혀 감격스럽지 않은데 엄마가 우니까 눈물이 났다. 무슨 감정이었을까. 뭔가 엄마가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 동생도 울었다. 전화로 이야기하다가 마음이 이상하다며 울었다. 마찬가지일 것 같다. 분명.


2021. 01. 25

의사쌤과 간호사쌤, 가족들한테 축하 받은 주말엔 임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는데 출근을 하고 ‘우이혼’을 봤더니 출산과 육아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만 느껴진다. 잃을 건 확실하고 구체적인데 얻을 건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몸도 망가지고 일도 쉬어야 하고 여유도 없을 거고 취미도 못 하게 될 거다.


태호와 나 모두 지치고 예민해지고 지금보다 자주 싸우겠지. 이 모든 것을 잃고 얻는 건 하나. 아이. 하지만 아이가 주는 기쁨이란 건 아직 전혀 상상할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해야겠지만 쉽지 않다. 엄마가 기쁘긴 한데 내가 너무 힘들 걸 알아서 걱정이 크다고 했다. 엄마만이 내 앞날을 정확히 아는 것 같다.





병원에서 임신을 확인한 직후 쓴 일기엔 감격과 기쁨보단 불안과 걱정이 가득하다. 계획한 임신이었고, 물흐르듯 수월하게 임신했는데도 그랬다. 나중에 안 건데, 임신 초기는 호르몬 변화가 급격해 감정이 불안정하다고 한다.


하지만 단지 호르몬 탓만은 아닌 게, 생각하면 할수록 이 나라는 아기 키우기가 지독하게 힘든 곳이고, 임산부에게 친절한 사회도 아니고 앞 날이 깜깜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암담함은 임신 10주쯤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임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 건, '회사 임밍아웃'이었다.




2021. 02. 26

회사에 임밍아웃했다. 지난 8주 동안 가족을 빼곤 임신을 알리지 않았고 그렇다보니 축하받을 일도 없었고 오히려 대중교통이나 인터넷 공간에서 아이와 임산부에 대한 배려나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부정적인 심지어는 적대적인 반응을 많이 봐서 마음이 많이 다친, 방어적인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우리 팀원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진심으로 축하해줄 거란 믿음. 그리고 역시 그러했다. 무엇보다 아이를 반가워해주는 마음들이 너무 고마웠다.


사실 임신을 축하한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새로 태어날 아이를 환영해주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나를 축하해줄 일은 아니다. 그러길 바라지도 않는다. 곧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아이를 국가의 노동력, 미래의 일꾼, 한국의 미래 뭐 이런 이유가 아니라 그냥 한 생명으로 환영해주면 그걸로 나는 눈물나게 감사하다.


그래서 말하다 울 뻔했나. 호르몬 탓인가. 생각보다 그간 다친 마음이 크다. 그만큼, 오늘 회사에서의 임밍아웃이 큰 따스함을 주었다.




기분이란 건 내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임신 사실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라는 질문의 답을 곰곰히 찾아가다 보면, 기분이란 게 상당부분 사회적인 것이란 걸 깨닫는다.


임신은 내 몸에서 벌어지는 아주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어떤 경험이 되는가는 내 주변 환경에 따라 너무나 달라지는 일이었다.


태호가 감격스런 반응을 보였을 때 함께 감격했고, 의료진이 한껏 축하해줬을 때 임신은 축하받을 일이구나 싶어 감사했고, 가족들이 기쁨과 염려의 눈물을 흘렸을 때 나 역시 기쁨과 염려의 눈물을 쏟았고, 임산부와 아이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접하며 나도 임신과 육아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임신과 새로 태어날 아기를 진심으로 축하해본 적 있는 당신은 참 고마운 사람이다. 임신이라는 너무나 낯설고 두려운 과정을 이제 막 시작한 여성이, 당신 덕에 불안과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냈을 테니까.


임신을 하고 나서야 이걸 깨달은 나는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먼저 임신한 선배와 친구들을 좀 더 따뜻하게 축하해주지 못 했던 날들을 반성한다.


앞으로는 '엄마'라는 막막한 여정을 시작한 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이 세상에 찾아온 아가를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열 번이고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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