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미소

가까우면서도 좁혀지지 않는 사이

by 프롬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며 모임을 마무리한다.

은지는 사람들에게 같이 식사를 하러 갈 거냐며 묻는다.

은지의 눈빛 하나 행동 하나까지 계속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오늘도 조용히 사람들을 따라 나선다.

한 달에 두 번씩 책을 읽는 모임 '책갈피'는 8년째 매주 둘째 주, 넷째 주 일요일 아침마다 모여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임의 리더는 은지와 지민이다.

둘은 같은 회사의 동료로 만난 동갑내기 친구인데, 같은 관심사가 많았고 무엇보다 취향이 비슷했다.

한 번씩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로 말하고자 하는 걸 똑같이 말해서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따라서 하는 거냐며 오해할 때도 많았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책을 며칠 사이에 똑같이 사기도 했고, 그게 옷이든 악세사리가 될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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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늘 배가 고팠다. 어렸을 때 이혼한 가정에 할머니는 본인보다 남동생을 끔찍하게 여겼다. 돈벌이가 마땅치 않은 아버지 밑에서 장녀 역할을 하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안 해 본 알바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명절이나 제사 음식을 80세 할머니 혼자 하는 게 마음이 아파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혼자 하는 게 당연했다. 아버지가 집을 경매에 넘어가게 만들었을 때도 어떻게든 큰돈을 처음 대출하여 집을 지켜내는 맏딸이었다. 그런데도 집 밖을 맴도는 남동생이 어쩌다 한번 집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꼭 나보다 남동생에게 복숭아 하나, 전 하나를 몰래 챙겨줬다. 그 자식은 집을 위해서 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왜 나한테 사랑을 더 주지 않는 게 그렇게 서운했다. 이 집을 누구 때문에 지켰고, 명절을 누구 때문에 지내고 있는데, 집에서 내 역할은 당연했고 식모 같은 생활에 지쳐갔다.


그래서 애정이 고팠고 관심이 고파서 늘 허기가 졌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자신이 주목 받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집에서 채우지 못한 사랑을 밖에서 채우며, 내가 가장 사랑 받아야 한다고 합리화했다.


"은지 : 지민아 이 책 내가 읽어봤는데 너무 좋았어, 여행과 일상을 함께 다룬 에세이라서 읽으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책이더라. 우리 다음 모임 때 같이 읽어봐도 좋을 것 같아."


"지민: 네가 추천해주는 책이니까 한번 읽어 봐야겠네"


그날 저녁 지민의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ㅇㅇㅇ" 책 완전 내 스타일이네, 강추! "


내가 분명히 추천 했는데 왜 서점에서 봤다고 글을 올린 거지? 생각해보면 내가 예쁘다고 추천한 립글로스를 빌려서 바르고 찍은 셀카를 올리고 선물 받았다고 올린 글을 본 적이 있다.


'우연이겠지... 궁금하지만 물어보고 괜히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 넘어가야지, 나한테 피해를 주는 건 없으니 괜찮을거야 ' 은지는 지민이에게 점점 말하지 못할 비밀이 쌓여가고 있었다.



은지는 어렸을 때부터 아파도 학교 결석 한번 한 적 없는 지독한 성실함을 가지고 있었다. 성실함을 몸소 보여준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 남의 것을 탐하기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하다보면 모든 것에 결실을 맺는다고 굳게 믿었다. 항상 나만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실체를 알기 전까지는 세상이 올바르게 흘러간다고 굳게 믿었다.


모임을 끝나고 팀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칼국수 집에 갔다. 식당이 너무 협소해서 옆자리 사람의 허벅지가 느껴질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앉았고, 본의 아니게 내 다리를 정리하다가 앞 사람 다리와 부딪치기도 했다.

상철: "은지님 다리가 길어서 자꾸 부딪치네요. 은지님은 다리도 길고 키도 커서 너무 부러워요"


지선: "맞아요. 오늘 입은 원피스도 키 큰 사람 아니면 소화 못할걸요?"


은지 : "아이고 아니예요. 괜히 저 때문에 자리가 불편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지민: "은지야 너 다리 좀 접어야겠다. 앞에 상철씨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지민이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칭찬하는 것을 아까워했다. 그러고보면 나도 칭찬에 감사함을 표현하면 되는데 그저 겸손이 미덕이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낮추기만 했다.


지민: "그거 알아요? 제가 어디서 봤는데 앉아 있을 때 상대방 무릎이 향하는 방향을 보면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대요"


은지: "그걸 어떻게 알아?"


지민: "무릎이 출구 쪽으로 향해 있으면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신호고,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무릎이 그쪽으로 향해 있대"


"상철,지선: 오? 무릎 방향 기억 해야겠다"


모임 사람들이 모두 흥미진진해했다.

칼국수가 드디어 나왔고 다들 사진을 찍으며 칼국수 기자회견을 한참을 한 후에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참을 칼국수를 먹다가


지민: "오늘 따라 칼국수 국물도 너무 짜고 면발도 덜 익었네"


은지 : "그래? 나는 맛있는데? "


지민: "너는 애가 참 무디다"


그냥 무심코 한마디씩 툭 하는 말들이 가슴에 켜켜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지민의 sns에는 칼국수 사진과 "여전히 맛있는 단골 칼국수 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점심" 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분명히 맛없다고 투덜대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왜 거짓말하는 sns 세계에 사는 걸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매해 연말이 되면 독서 연합 모임에 나와 지민이는 대표로 참석하고 있다.

항상 보던 사람들만 있었는데, 오늘은 새로 온 남자 대표가 보였다.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띠며 우리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밤 산책 리더 김홍준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책갈피 리더에 성은지, 박지민입니다"


훤칠한 키에 코발트블루 셔츠가 아주 잘 어울리는 남자였고, 무엇보다 환한 미소가 참 예뻤다.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우리는 비슷한 나이와 공감대로 꽤 대화가 잘 통했다.

모임을 마치고 더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과 2차 뒷풀이를 가지게 되었다.


시원한 맥주와 간단한 안주들이 있는 펍이었고, 토요일 저녁 번화가 동네라서 사람들이 점점 모여 들기 시작했다. 기존에 자주 보던 모닝북 대표님의 주최 하에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같은 테이블에 앉는 사람들 자리가 중요하기도 하고, 낯가림도 심한 나는 선뜻 앉지 못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때 지민이가 내 팔을 붙잡고 정중앙 왼쪽에 나를 자신은 오른쪽에 앉았고, 홍준씨를 우리 앞에 앉게 유도했다.


'오늘은 홍준씨가 마음에 들었구나. 적당히 분위기보고 빨리 빠져줘야겠다'


같은 또래이고 비슷한 관심사가 많아서 대화주제가 끊이지가 않았다. 술에 조금씩 취해서 나도 모르게 젓가락을 자꾸 떨어뜨리게 되었다. 떨어진 젓가락을 줍는데 맞은 편 오른쪽에 앉은 홍준씨 무릎이 나를 향해 있는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무릎 방향으로 호감을 알 수 있다는 지민이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옅게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우리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가 않았다. 순간 내 이름이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듣게 되었다.


지민: "제가 은지 때문에 고생이 참 많아요. 은지가 워낙 곰 같아서 사람들 챙기는 거에 서투르기도 하고, 트렌드에 맞춰서 sns 홍보도 해야 하는데 잘 못해서 제가 하느라 쉽지가 않아요."


홍준: "은지씨 블로그도 많이 하잖아요. 저는 너무 재밌던데"


지민: "요즘 누가 블로그를 해요, 다 옛날 일이지. 요즘은 다 제 sns 보고 많이 들어와요. 블로그는 뭐 은지 기록용이죠. 자기가 좋다는데 뭐 어쩌겠어요. 기록이라도 해라고 해야지."



무쇠 같이 듬직하던 곰은 그제서야 속에 들끓는 화를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하지 못 했던,아니 말하지 않았던 비밀들이 내 속에서 와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내가 말을 잘 못해서 지민이와 관계가 나빠질까봐, 내가 오해해서 잘못 말한 걸까봐 꾹꾹 담아놨던 말들이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본 재난 영화에서 불과 몇 초 만에 도시의 건물들과 땅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아우성 치며 땅으로 꺼지는 장면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가슴이 용광로처럼 뜨거워지고 머릿속은 땅으로 꺼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상처로 녹아내린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게 되었다. 5분쯤 지났나, 풀린 다리를 죽을힘을 다해 일으켜 세우고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위선적인 자리에 더 있을 자신은 없어서 급한 일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도 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는 나를 보고 지민이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잘 가’ 라고 손 인사만 대충 하고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오늘은 그 뒤통수가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지하철을 향해 최대한 넓은 보폭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직도 뜨거운 가슴을 부여잡으며 빠르게 움직이는데,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 금세 머리카락이 축축해졌고 이게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뒤섞인 액체들을 손으로 대충 훔쳐내며 직진만 했다.


홍준: "은지씨 같이 가요"


홍준씨가 같은 방향이라며 나를 따라왔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꼭 누군가가 나타나서 불편하게 만드는 지금 순간이 너무 싫기만 했다.


애써 입꼬리가 경련이 나도록 웃으며


은지: “홍준씨 지하철 타시나봐요?"


홍준: "은지씨 목소리 이제야 제대로 처음 들어보네요."


은지:" 네? 아까 이야기 같이 했는데?"


홍준: "워낙 지민씨만 계속 말해서 은지씨랑 대화를 하고 싶었어요. 저 사실 책갈피 블로그 8년 동안 계속 봐왔어요. 종종 댓글도 남겼는데, 문나잇이라고..."


은지: "네? 문나잇님이요? 홍준씨가요?"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장군처럼 씩씩하게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홍준: "와 이제야 제대로 저를 봐주네요. 은지씨 얼굴 보기 참 힘드네요."


은지: "...."


홍준: "아까 지민씨가 하는 이야기 다 들었죠? 은지씨 숨어 있는 거 사실 봤어요. 저 사실 집 이쪽 아닌데 은지씨랑 대화하고 싶어서 일부러 따라왔어요. 어찌나 빨리 걸어가던지 다리 길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은지: "아뇨. 저는 급한 일이 진짜 있어서..."


홍준: "sns에 글 한 줄, 사진 1장 올리는 사람보다 8년 동안 독서 모임 기록을 정성스럽게 쓰고, 모임 사람들 특징까지 분석해놓은 사람한테 저는 더 마음이 가던데요?

은지씨가 아무리 곰 같다고 해도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걸 저는 알아요"


은지:"지민이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예요. 술 마시고 취하면 한 번씩 기분이 업 되서..."

홍준:"오늘 모임부터 뒷풀이까지 내내 은지씨가 말만 하면 가로 막고, 자신만 돋보이려고 기를 쓰던데... 은지씨 둔한 거예요?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거예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들키고 싶지 않던 비밀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고,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참아왔던 아우성이 내 안에서 소리치기 시작했고, 셀 수 없는 감정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내 핸드폰에 카톡도 함께 쏟아졌다.



' 은지야 왜 빨리 갔어?

' 한참 재밌었는데.'

' 홍준씨 괜찮지 않아?'

' 아까 이야기해보니까 나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

' 왜 답이 없어, 벌써 자는 거야? '

' 나 오늘 옷 입은 거 괜찮지 않았어?'


쉼 없이 울리는 카톡처럼 내 가슴 속의 비밀들도 모두 쏟아져 나왔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정리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울리는 핸드폰의 카톡을 보면서 실소를 하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보는 홍준은 은지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민이는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sns에 올릴 사진을 고르며 생각을 했다.


‘은지가 내가 하는 이야기 못 들었겠지? 내 비밀은 아무도 알면 안 되지, 나는 절대 안 들킬 거니까.’


sns에 올린 게시물에는 진하게 메이크업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지민의 셀카 뒤에, 은지가 눈이 반쯤 감긴 채 잘못 찍힌 사진이 올라왔다. 역시나 은지의 동의 없이


"올해도 은지와 함께 한 연합 모임, 끝나고 뒷풀이까지 너무 즐거웠다. " 멘트와 함께 사진이 올라갔다.


그리고 오늘도 혼자만 알 수 있는 승리의 미소를 띄며 sns의 댓글이 올라오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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