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라는 단어의 달콤함

성취감 중독자

by 프롬나

11월이 다가왔고 ,눈 한번 감으면 올해도 곧 지나갈 것이다. 이럴 때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매해 나는 11월의 우울증을 겪는데, 첫 번째 단계는 잘 때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지 후회가 밀려오면서 잠을 설친다. 두 번째 단계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자꾸 내가 못나 보이고, 내가 너무 게으르고 뒤쳐지는 게 아닌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만족할만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강박관념을 가질 만큼 루틴에 집착하게 된 것을 느꼈다.

매일 나는 일어나자마자 핸드폰 어플에 오늘 하루 해야 하는 일들의 리스트를 체크한다.


○ 눈 뜨자마자 유산균 챙겨먹기

○ 주 3일 새벽 공복 1시간 운동

○ 매일 점심 먹고 스쿼트 하기 (무릎 부상으로 강화운동)

○ 주 3일 저녁 배드민턴 운동

○ 매일 영어회화 어플 10분

○ 주 2회 전화 영어 20분

○ 매일 독서 10분

○ 매일 5천보 이상 걷기

○ 매일 잠들기 전 한 줄 일기 쓰기


사실 더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개인 정보로 이 정도로만 정리해보겠다.

이 많은 일들을 체크 하며 줄 치는 과정이 생각보다 많이 짜릿하다.

그리고 한 번씩 이 일들을 모두 다 지우고 난 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해하며 잠이 든다.

일상의 루틴들이 모여서 내 하루가 완벽하게 잘 정리되었다는 기쁨과,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내가 그 일들을 해냈다는 마음이 모여서 성취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그 성취감에 중독되어서 하루에 더 많은 해야 할 일들을 과도하게 억지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좀 더 부지런하고 남는 시간들을 허투루 안 써야지 내 하루가 완벽해질 거라는 생각들에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었다.


배드민턴을 하다가 점점 왼쪽 무릎과 아킬레스건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미루다가 정형외과에 진료를 받고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이미 관절염이 진행 되고 있고, 이렇게 쓰다가 50대에 인공 관절 수술을 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잔뜩 겁을 줬다. 일상의 큰 행복인 배드민턴을 못 친 다는 것에 우울했고, 그만큼 내 몸이 건강하게 잘 따라주지 못해서 너무 슬펐다.


그때부터 내 일상의 루틴들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절하면서 계획을 짜야 하는데 나는 그저 똑같이 내 몸이 따라주기를 바라며 억지로 이어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 공복 운동 하던 루틴을 실패로, 여러 루틴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공든 탑이 더 무너지기 쉽다고 했던가, 하나를 안 하게 되니 전부 다 안 하고 오늘 하루 그냥 실패한 하루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나는 성취감을 얻는 날들이 줄어들었고, 나약한 나 자신을 탓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해야 하는 일들의 리스트를 체크하며 없애는 기분으로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무것도 체크하지 못하고 텅 빈 기록을 보면서 내 하루는 왜 이렇게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인지, 자책하기 시작했다. 다시 바로 잡으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한번 틀어진 루틴을 바로 잡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지 마지막 까지 잘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나는 다시 첫 시작을 잘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성취감에 목마른 것일까, 완벽한 하루가 있는 만큼 온전히 휴식하며 내 머릿속을 비우고 쉬는 날들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쉬는 날 하루도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나를 너무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누구보다 성취감 있는 하루를 만드는 것에 집착하고, 시간 낭비하는 것을 너무 싫어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내가 다 해내지도 못하는 과한 계획에 허덕이며 하나라도 체크를 하지 못하면 성취감을 얻지 못했다고 실망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내 자신을 판단하고 보니, 나는 어쩌면 자신만의 루틴을 꾸준하게 해내는 사람들을 마냥 동경해 왔던 것 같다. sns 혹은 열심히 사는 그들의 속사정을 내가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그들처럼 나도 완벽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들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서 적용시킨 것일 텐데, 나는 그런 과정들을 겪지도 않고 단지 해내려고 억지로 나 자신을 밀어 붙인 것이 부끄러웠다.


쉬는 날, 새로 생긴 만화 도서관에 구경을 갔다. 생각보다 조용한 1층에서 그동안 미뤄뒀던 1달치 일정들을 다이어리에 모두 정리해보았다.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일상 속에서도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상들을 기록하니 사라지기 전에 묶어두는 것처럼, 내 소중한 일상들이 무사히 자리 잡은 느낌이 들어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알차게 다이어리 정리를 끝마치고 만화 도서관 2층을 갔다. 1층의 조용한 분위기와는 완전 상반되게 많은 사람들로 좌석들은 대부분 가득 차있었다. 특히 편안하게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들이 계단 옆에 10좌석 정도 있었는데 그 소파들이 인기좌석이라서 모두 만석이었다. 아주 어릴 때 보던 고전 만화부터 요즘 인기 많은 웹툰까지 다양한 책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어린이들보다 어른들의 비율이 더 높았고, 책상, 바닥, 소파 어떤 좌석을 막론하고 옆에 만화책들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편안하게 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보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만화책을 많은 시간을 내서 읽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 편히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누구나 도움이 되는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학교에서 꼭 읽어야 하는 고전 책들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성취감에 안도하는 척 했고, 몰래 죄책감으로 읽는 만화책이 더 기억에 강렬히 남아서 또 읽고 싶어 하는 학생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만화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완결까지 도장 깨기 하는 성취감을 느끼는 행복한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틀에 얽매여 남들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내가 좋아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으로 성취감을 느끼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있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흔들리지 않게 차곡차곡 하루를 잘 쌓아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다시 내 일상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 눈 뜨자마자 유산균 챙겨먹기

> 주 2회~3회 30분 운동하기

> 주 3회 이상 점심 먹고 스쿼트 하기 (무릎 부상으로 강화운동)

○ 주 3일 저녁 배드민턴 운동

○ 매일 영어회화 어플 10분

> 주 2회 전화 영어 20분-> 12월 초까지만

> 주 3회 이상 독서 10분

> 주 5일 5천보 이상 걷기

> 잠들기 전 한 줄 일기 쓰지 말고 일찍 잠들기


> 표시한 부분을 가능할 수 있게 목표를 완화시켰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씩 내 속도에 맞추다 보니 훨씬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잘하는 것보다 일단 꾸준히 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고, 혹시나 하지 못해도 나 자신을 크게 자책하기보다, 내일 다시 하면 되지 하며 스스로 다독여주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제일 아껴주고 사랑하자고 항상 다짐하지만, 그게 제일 힘든 것 같다.

이제 곧 내년 계획을 또 거창하게 다이어리에 적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계획 짜는 걸 제일 좋아하는 J는 어쩔 수 없다. 올해부터는 내 계획들은 현실적이고 남에게 맞추는 게 아닌 나를 위한 한 해로 만들기 위해 가득찰 것이라 예상된다. 그만큼 내 기준을 조금 완화시키고, 목표들을 세분화해서 성공률을 높여서 내 자존감도 많이 올리고 단단해지는 한 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일단 남은 ‘올해는 성취감에 그만 집착하고, 나 자신을 사랑해주자’ 가 다이어리에 적혀있다.


좋은 의미로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에 이제 집착을 해봐야겠다.


올해 남은 11월, 12월 파이팅 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