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과 1월 사이의 단상들
산부인과에서 일한지도 벌써 5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동안 셀 수 없는 진상 환자들과 텃세 부리는 선배들 덕분에, 매일 울면서 지낸 날들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어느새 여자 군대의 세계에서 고참 자리를 잡게 되었고, 편안한 분위기에 매일 똑같은 일상을 지내고 있다. 일주일의 끝자락인 주말은 너무 늦게 오는데 한 달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어느새 한 해가 끝나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3년 동안 똑같은 동료들과 입사자와 퇴사자 없이 편하게 지냈던 병원에서 연차가 제일 높은 선배가 퇴사하면서 신규 직원이 들어오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모든 걸 어려워하며 민폐 끼칠까봐 어려워하고, 옆에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동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볼 때면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곧추세우고 일하게 된다.
실수도 많고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자주 울던 신입은 오늘도 거르지 않고 울었다. 괜찮다고 달래주니 다시 울음이 시작되었고, 마치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슬픔이처럼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쉬지 않고 떨어졌다.
나에게는 지루하고 별일 없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힘들고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맘 졸이는 하루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입은 퇴근길에 진료 대기 환자가 떠있는 화면을 사진을 찍었다. 그 화면에는 담당 의사 사진과 오른쪽 귀퉁이에 아주 작은 글자 크기로 담당 간호사 ; ooo 이 적혀 있었다.
왜 사진을 찍었냐고 물으니 자신의 이름이 화면에 있는 게 너무 신기해서 찍었다고 했다. 나도 병원에 소속감을 느끼며 고마워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진상 환자가 내 이름이라도 알아 갈까봐 무서워서 이름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순수했던 신입의 마음에서 아주 새까맣게 때가 묻어버린 내 모습을 보면서 많이 변화하고 성장한 걸 느꼈다.
신입 직원이 동경 하는 마음이 깨지지 않도록 올바른 선배가 되어야겠다는 책임감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처음으로 소속 이름이 적혀 있던 그 순간,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소속감에 감사해 하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초심의 마음을 가져 봐야겠다.
연말이 다가오고 뭔가 헛헛한 마음을 채우려고 작은 소비를 여러 번 했다.
‘티끌모아 왕 티끌’ 이라고 했던가, 결과적으로는 아주 큰 소비가 되었다.
그래서 카드 값이 평소보다 많이 나왔고, 정작 정말 필요한 물건을 못 사는 상황이 발생했다.
홈쇼핑이나 온라인 쇼핑 광고에 ‘지금 아니면 못 산다’ ,‘마감 임박’, ‘이번이 아니면 다시 기회는 오지 않는다’ 의 문구가 자꾸만 나를 안달 나게 하고 없던 물욕도 갑자기 생겨났다.
쇼핑을 하면 내 안의 헛헛한 마음도 가득 채워질 것만 같은 환상을 가지게 된다. 정작 쇼핑한 물건들은 내 방에 정리되지 못한 채 뒤죽박죽 쌓이기 시작했고, 내 마음의 자리들도 서로 뒤엉켜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었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단백질 쉐이커와 대용품들, 탄력 있는 피부를 만들어주는 화장품, 시린 발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방한 부츠까지 나는 유혹을 피하지 못하고 휩쓸려갔다.
그리고 기어코 다시 내 루틴을 잡기 위해서 습관을 형성해주는 인플루언서의 다이어리를 구매했다. 월 단위의 목표를 정하고, 주 단위의 타임 블록을 만들어서 비어 있는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고, 하루의 마지막을 항상 회고를 하며 오늘의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했고 유지하여 발전할 수 있을지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비싼 다이어리 값어치의 쓰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 열심히 기록을 하며 내 루틴을 잡아나가고 있다.
내 일상도 다이어리처럼 다시 차분하게 정리되길 기대해보면서, 나는 뒤죽박죽 섞여 있는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기어코 쇼핑왕이 되어본다.
재미없고 평범한 날들 속에서 나는 점점 불평이 많아지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반복을 계속 하게 되었다.
해외여행을 밥 먹듯이 자주 가는 사람, 빠르게 트렌드를 섭렵하며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 온갖 산해진미는 다 먹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일상은 왜 이리 퍽퍽하고 재미가 없을까? 생각하며 반복되는 일상에서 재미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이렇게 비교하는 모습이 쓸데없는 시간으로 소모된다는 걸 아는데도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비가 억수같이 오는 길 너무 춥고 발도 젖는 게 싫어서 온갖 짜증나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걸어가고 있었다. 집 앞 횡단보도에서 자주 만나는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가 귀여운 노란 우비 옷을 입고 비 오는 산책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마치 신나는 댄스를 추듯이 걸어가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우아한 걸음의 리듬과 꼬리의 움직임이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서 마치 하나의 댄스 경연의 독무를 보는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리트리버에게는 빗물이 가득 담긴 웅덩이도 핫한 댄스 스테이지가 되었고, 비에 흠뻑 젖어 널부러져 있는 낙엽들도 최고의 장난감이 되었다.
문득 나는 뭐가 그렇게 안달이 나서 계속 스스로를 갉아먹고 괴롭히며 지냈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날의 날씨가 어떻든 자신의 기분을 마음껏 즐기면서 주인과 함께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는 리트리버를 보며, 나까지 입가에 행복한 웃음이 번졌다.
리트리버처럼 나만의 즐거움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아주 간단한 해답을 얻어서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도 리트리버는 산책을 나왔을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괜히 한번 더 뒤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꾸준히’ 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운 좋게 갑자기 잘 되는 요행보다 꾸준히 쌓아올려서 성과를 이루는 것이 훨씬 탄탄하고 오래 간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꾸준히 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매일 독서하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콤한 유투브 숏츠, 의미 없는 스크롤 내리기를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쓸데없는 시간이란 걸 아는데도 중독성을 이겨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점점 책을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나는 루틴을 정하기로 했다. 자기 전에 무조건 10분 이상 책을 읽기로 했다. 마침 브런치에서 라이브 독서 챌린지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효과를 보고 있다. 라이브로 독서를 하는 중에는 다른 어플은 안 들여다보게 되고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독서 챌린지를 하면 얻게 되는 리워드라는 목표가 있으니 더 꾸준히 하게 되는 힘이 생긴다.
작은 한 걸음이지만 시작하는 게 반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게 내 속도에 맞춰서 뭐든 하면서 소소하게 성과를 이루는 날들로 계속 채워나가고 싶다.
‘올해는 꼭 다독할 수 있기를 파이팅!’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꾸준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