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저는 격리시설에 갈 수 없나요?
Jour 3 - 2020년 3월 30일
월요일이 되어서 보건소, 주민센터에서 돌아가면서 전화가 왔다. 화요일에 받을 수 있을 거라던 생필품을 받았다. 구청에서 나와서 인터폰으로 내가 집에 있는지도 확인했다. 공무원 분들 너무 고생 많으시다. 그나마 우리동네는 확진자도 적은 편이고 자가격리자도 적은 편인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인 걸까. 다 같이 격리돼야하는 상황에서 나는 미리 분류가 돼 있어서 이것저것 빨리 조치를 받았다. 다른 팀원들이 조치 받는 걸 확인하고 나도 문의를 해보고 이래저래 바쁘게 보냈다. 모든 팀원이 음성 판정을 받았다. 천만다행. 이 정도면 견딜만 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하루.
동네 카페에서 배달의민족으로 커피와 디저트를 시켰다. 자가격리 중이니 현관문 앞에 놔달라고 주문사항에 적었다. 단호박파이는 언제나처럼 맛있었고 애플크럼블은 남겨두었다 먹자고 생각했다. 간만에 커피를 마시니 정신이 좀 드는 것도 같다.
전담공무원 선생님은 엄청 친절하시다. 매일 한 번씩은 이것저것 묻는다. 선생님은 이 일이나 상황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고, 대비해두었던 상황이 아니니 내가 이것저것 물으면 매번 다른 분께, 혹은 중대본, 혹은 질본에 확인해주셔야 할 것인데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항상 알아봐주신다. 폐 끼치는 것이 정말 싫은데 고생해주시는 분들께 보답할 수는 없나 잠시간 생각했다. 심리상담 선생님께도 이것저것 적어 메일을 보냈다.
저녁에는 남편이 자꾸 배달해먹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커피 드립백과 이것저것을 방에 넣어주었다. 결혼 전 샀던 리이케 드립백을 발견했다. 프릳츠 커피티백도 발견함. 노멀사이클코페에서 샀던 커피티백도 하나 남았다. 커피 풍년이다.
저녁엔 킹덤 시즌2를 시작했다. 몰입도 100이라 진짜 신나게 봤고 몰아서 1-6화를 다 보고 나니 아쉬웠다. 사실 작년 가을쯤 스포일러를 들어서 매우 기대하고 있었는데 스포일러 여러개 중에 하나만 맞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스포일러를 해준 사람의 지독한 캐릭터에 대하여.
Jour 4 - 2020년 3월 31일
아침부터 스트레스 100 받는 일이 있어 현기증 좀 나고. 새벽부터 심기가 언짢아서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게 겹쳐서 컨디션 최악이었다.
집에 면역억제제를 먹는 사람이 있어 위험할 수 있기에 나 같은 자가격리자는 격리시설에 갈 수 없는지 물었다. (라고 적었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아침부터 시어머니와 남편이 대판 싸웠고, 나는 내 이야기이지만 끼어들 수 없었고 복잡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집에서 혼자 밥도 해 먹을 수 있고 유증상자가 아니라 갈 수 없다고. 더 어려운 상황에 계신 분들이 가야한다고 설명해주셨다. 더불어 음압차와 구호복 입은 분들이 방문한다고, 그렇기에 동네에 불안감을 조성할 수도 있으니 어려울 것 같다 답을 받았다. 확인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아침 내내 울다가 전화 받아서 전화 끝에 목소리가 좀 울먹거렸다. 그래서인지 곧 보건소에서 심리상담 관련한 문자를 받았다. 담당공무원님이 신경써준 탓이리라. 대부분의 팀원이 자취 중이라 혼자서 지내는 것도 걱정이지만 나처럼 가족 구성원에게 옮길 수 있는 상황도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친정에서 플레이스테이션4를 배달해줬다. 자가격리 중이기도 하고, 집도 온전한 내 집이 아니라 뭐 하나 먹이지도 못하고 그냥 보냈다. 다음에 맛있는 거 사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동생도 나름 바쁘고 일이 많을텐데, 누나 걱정도 됐는지 부탁하자마자 와주었다. 새삼 별 게 다 고맙다. 플스 받았다고 트위터에 이야기하니 자가격리 유경험자 친구가 psn 아이디도 빌려주었다. 마침 ps plus 멤버십이 14일간 구독 무료길래 냉큼 가입했다. 게임은 뭘 해야할 지 모르겠어서 어렸을 때 자주 하던 소닉과 Journey 라는 게임을 받았다. 다운로드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니드 포 스피드도 해볼까 고민이다. 고3때 하마터면 나를 입시탈락자로 만들 뻔한 GTA도 보인다. 하지만 만만찮은 가격 때문에 고민이다.
심리상담 선생님에겐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길게도 적어 보냈다. 늘 응원한다고 답장해주셨다. 폴댄스 학원 선생님도 정말 다행이라며 이것저것 집에서 할 수 있는 스트레칭을 추천해주신다. 스트레칭 밴드에도 강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쿠팡 로켓배송을 이용해 매일 야금야금 소비중이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사이에서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들이 지금의 나를 살린다.
마침 친구들과 벌이기로 한 일은 명의가 내 앞으로 되어있어 이것저것 내가 직접 해야하는 일이 많아 기동력 있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격리되는 바람에 이것저것 일이 좀 틀어졌다. 이래저래 스트레스 받는 하루.
한 친구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추천했다. 자가격리 중이라 영화를 보러 나갈 수 없다 하니 소식 봤다고 한다. 기사로 쉼없이 나오는 우리 팀 이야기에 지친다. 연락을 오조오억명에게 받았다. 여튼 친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여러 개를 추천해줬다. <원헌드레드> 와 <믿을 수 없는>을 보기로 했다. 고마운 친구. 시간이 많아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은 많지만 내 마음이 지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는 때가 많아 잠시 멈춰있다.
지지난 주말에 결혼식 스냅사진 원본을 받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보다가 함께 찍힌 친구들에게도 보내주었다. 사진 내내 웃고 있는 내가 어색하다. 하지만 다 추억이니까, 기분 좋은 추억이라 잠시간 기분 전환을 했다. 체온은 정상이고, 증상도 없다.
Jour 5 - 2020년 4월 1일
집 작은 방 안에서 4월을 맞았다. 4월이 되면 동네에는 벚꽃이 참 예쁘게 핀다. 작년엔 이때쯤 우이천도 걷고, 강북구립체육관 앞 벚꽃길에서 사진도 찍었었다. "꽃놀이는 하지 않겠지만 출퇴근길 벚꽃을 볼 수 있겠다!" 하며 즐거워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나는 앞으로 8일간 밖에 나가지 못한다. 오늘 포함하면 9일. 최악이다.
PSN 게임 Journey 다운로드 완료. 조작법도 쉽고 온전히 공략을 하나도 보지 않고 내 힘으로만 깬 게임. 그래픽도 너무 예쁘고 음악이 진짜 좋았다. 남편 헤드셋 몰래 가져와서 컨트롤러에 꽂고 플레이하니까... 크으 역시 게임도 장비빨이구나 싶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보자 하니 엔딩. 엔딩을 보고 나니 아침이었다. 눈이 피곤해서 잠들었다.
오전 10시에 모니터링 전화받고 일어나, 체온을 재고 다시 잠들었다가 두번째 모니터링(오후 3시) 할 때쯤 일어나 체온을 쟀다. 증상은 없고 체온도 정상범위이다. 3시 반 쯤부터 정신차리고 딸기케이크 한 조각을 배달했고, 커피를 내려 마셨다. 어머니가 떡볶이를 사다주셔서 아점저 겸하여 끼니를 때웠다. 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 배도 별로 고프지 않다. 다만 단 걸 먹으면 기분 좋아지겠지 싶어 자꾸만 단 걸 찾는다.
이렇게 일이 될지 모르고 차에 두고 온 것이 있어 혹시 지하 주차장 정도까지는 나갈 수 있는 건지 물었더니,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동행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락할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나가지 않는 것이 맞지... 두 시간 뒤 쯤 자가격리자에게 보내는 문자가 장문으로 왔다. 구에서 보낸 문자. 자가격리지 이탈 시 원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즉시 고발조치 된다고 한다. 자가격리 지침 안 지키고 이탈한 사람들 기사를 봤다. 이렇게 적어보니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봤나 싶지만 네이버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자가격리를 해봤어야 알죠...? 남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내 일이 되면 더 당황하게 된다.
자가격리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사실 확인이 필요한 일이 있었는데, 대강 확인이 되었다. 더불어 헛소문이 더 이상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면있는 분이 잘못 알고 있길래 대강 정정해줬다. 알고보니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였다. 세상은 좁구나. 지금 이 상황이 가십으로 소모된다는 사실에 매우 화가 난다.
생맥주가 몹시 마시고 싶다. 퇴근길 밤 벚꽃을 찍어보낸 남편에게 캔맥주 사오라고 문자 보냈으나 안읽씹 당함. 남편과는 하루에 얼굴을 두 번 정도 본다. 신혼생활도 엉망진창이다. 이 팀에 합류하기 위해 신혼여행을 미루고 결혼한 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 했는데, 신혼여행은 내년 그 이후에나 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루를 늦게 시작했더니 하루가 빨리 가는 느낌인데, 심지어 저녁잠도 잤다. 차라리 잠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증상은 없고 체온도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