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민감자의 하루

by 솜사탕


HSP (Highly Sensitive Person)

고도 민감성 개인, 초민감자의 약어로 '매우 예민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구의 약 15~20%가 가지고 있는 이것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며

질환은 아니지만, HSP의 뇌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구조를 보인다.


HSP 테스트도 해보고,

많은 초민감자들의 생각과 일상을 보고 듣곤 했는데

나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무엇보다 그 얘기들을 다 모아보니, 나의 30년 훌쩍 넘는 인생이 왜 그랬었는지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통점은


머릿속 생각이 멈추질 않는다

(샤워할 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

네? 어떻게 생각을 안 할 수 있죠? 생각은 그냥 내내 하는 거 아니었나요? 나한테는 진짜 충격적이었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대화, 표정, 말투, 행동 하나하나 다 기억에 남아 분석하고 확대시킨다.

크고 작은 소리는 물론, 한숨 소리, 제스처, 눈빛까지 다 읽혀서 너무너무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안 보고 안 들으면 되잖아? 참 피곤하게 사네'라고 쉽게 얘기하며 우릴 한심한 듯 보겠지만

유전자와 뇌 구조, 그리고 기질이 '타고났기 때문에' 없앨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물론 의지로 조절할 수는 있겠지.


사람 많은 곳에 다녀오면 기가 다 빨려서 에너지가 급격히 소진되는 기분이다.

사람을 만나고 오면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나눈 대화와 생각이 계속 이어져서 감정과 시간 소모가 너무 많다.

그러니까 그 시간을 줄이는 것이 스스로에게 평안을 주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적당한 백색 소음은 괜찮지만, 그 수준 이상인 공간(카페 등)에서는 주변의 소리가 다 들려서 힘들다.

그리고 소리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 내용이 다 들려서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목소리가 크고 제스처가 커서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피하는 편이다.

시끄러운 콘서트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유, 조용한 자극과 낮은 조도가 훨씬 편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러닝 머신에서 걷고 뛰면서도 발라드 듣는 사람인데, 이건 그냥 본능 같은 것이었다는 걸.


둔감하지 않아서 아픈 것도 잘 알아차린다.

이유 없는 복통이 오래 지속된 적도 있었고,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관절이 아파 시달리기도 했다.

유독 목, 어깨 통증, 턱관절이 아픈 것도 그냥 초민감자들이 겪는 긴장의 연속이 원인이었다.

이유는 어딘가에 다 있었다.


냄새에도 예민하다.

향수를 과하게 뿌리고 다니는 사람 옆에 있으면 두통이 생긴다.

그래서 내가 어릴 때 차량의 방향제 냄새를 싫어했고, 특유의 기름 냄새를 맡으면 멀미를 했는데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게 엄마 손 냄새를 맡고 있는다거나 잠을 자버리는 것이었다.

차만 타면 잔 이유가 감각 자극이 발달한 것도 한몫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에 민감해서 분위기를 잘 살핀다.

그래서 눈치도 빠르고, 이 것이 눈치를 유독 살피는 것으로 진화했다.

타인의 반응에도 민감하니 당연히 배려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근데 또 과하게 오버하는 것은 싫어해서...


이렇게 모든 사람, 환경, 분위기를 다 알아차리니 쉽게 피곤해지고, 감정 기복도 심하다.

내 주변의 것들이 다 좋기만 할 순 없으니 당연히 그 상처는 고스란히 우리가 받는다.


작은 결정에도 심각하게 고민한다.

초민감자는 생각이 끊기질 않고, 하나의 안건이 입력되면 저 세상 끝까지 가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하고 보자, 아니면 말고'하는 식의 대범함이 없다. 소심하다.

완벽한 결과일 것 같으면 겨우 시도하겠지만, 세상에 완벽한 결과란 없고, 심지어 예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초민감자 머릿속은

퇴사 - 퇴사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 한심하게 볼까? - 재취업이 안되면 어쩌지? - 돈은 어떻게 충당하지? - 알바라도 해야 하나? - 아르바이트하면 쪽팔릴까? - 누가 날 보면 어떡하지? - 앞으로 취업이 절대 안 되면 어쩌지? - 뭐 해 먹고살아야 하지? - 하고 싶은 게 없다 - 난 왜 이러지 - 등등...

결국 이 과정이 피곤해서 잠 - 결정을 미룸 - 과감한 선택을 하지 못 한 나 자신을 자책하는 식의 반복


또 휴식 차 여행을 가고 싶은데,

표 끊고 호텔 예약하고 가서 뭐 하지? - 할거 없으면 어떡하지? - 휴가 쓴다고 말해도 되나? - 며칠 써야 눈치가 안 보이지? - 가서 혼자 쉬는 게 과연 재밌을까? - 재미없으면 어떡하지? - 얻는 게 없으면 어떡하지? - 그럼 후회할까? - 안 가는 게 낫나? - 이 모르겠다 이따가 생각하자

뭐 이런 식... (남들이 보기엔 완전 오버겠죠. 여행 가서 꼭 거창한 깨달음을 얻고 와야 하냐고 ㅎㅎ)


쉽게 압박감을 느낀다.

할 일이 눈앞에 쌓여 있으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각할까 봐, 늦을까 봐, 못할까 봐 등의 이유로 남들보다 빨리 일어나고, 빨리 출근하고, 빨리 움직인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나는 이유도 나 자신 때문이라기보다 '타인이 피해를 볼까 봐'인 편.


쓰면 쓸수록 피곤한 인생이네요...




하지만


오감이 발달된 특별한 사람이다.

좋은 의미로 눈치도 빠르고, 미묘한 감과 촉도 좋다.

내 감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청소도 잘하고, 정리정돈도 잘하고, 옷도 단정하게 곧 잘 입는 편.


예전부터 회사 사람들이 'OO 책상은 내일 퇴사할 것 같은 사람의 책상이에요' 할 만큼 물건이 없다.

요즘 미니멀리스트가 대세라고 하던데, 나는 원래 미니멀리스트. 뭐든 아주 잘 버린다.

나같이 생각 많은 사람이 물건에 까지 의미 부여하고 망설였다면 아마 엄청난 저장강박으로 이어졌을 것이라

진짜 진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촉이 좋아서 사기당할 위험이 적다.

타고나기를 원래 사람을 잘 안 믿는다.

불합리한 것, 정의롭지 못한 것도 못 참는 편.

상대방의 의도가 잘 읽혀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편이고, 그래서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조금만 이상해도 피하는 버릇이 있어서 관계를 잘 못 맺는 편인데,

한편으로는 요즘 시대에 되게 좋은 측면이라고 평가받기도 함.

위험한 세상이긴 하니까...


불편함을 잘 견딘다.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오감이 예민하고 피로함을 느끼면서도 그 불편함을 또 잘 견딘다.

피해주기 싫어서인 것도 있고... 그래서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고 점잖아 보일 수 있다.

(초민감자들의 속내는 그게 아니고 그냥 참는 것임)

또 아픈 것도 잘 참는다.




독특하고 예민하고 유별나다는 수식어를 달고 살면서 나도 나 자신을, 어제도, 오늘도 자책하며 사는데

세상의 수많은 초민감자들이 HSP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전까지 얼마나 자책하며 살았을지 안타깝다.


이 개념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것은 적어도 타인으로부터 '그럴 수 있구나' 하고 공감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나 자신이 나를 '원래 그런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작가의 이전글거봐, 할 수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