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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소나 Jul 12. 2018

신세계의 문을 열다   

<이민 일기 #14> 또다시 찾아온 인생의 기회


대망의 출근을 앞두고, 남편을 대동하여 운전 실습에 나섰다. 회사까지 로컬로도 갈 수 있지만, 하이웨이를 타고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는 거리이기에 미리 연습을 해두고 싶었다. 로컬로만 설설 다니던 운전 실력으로 하이웨이에 진입하여 속도가 빠른 차들 사이로 끼어들기가 제일 겁이 났다. 눈치를 몇 번이나 보다가 겨우 끼어들고, 차선도 바꾸지 못한 채 한 차선으로만 가야 했지만, 남편의 잔소리를 채찍 삼아 더 용기를 냈다. 하이웨이에서 내린 후에도 한참 더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리였으니, 이전보다 상당히 먼 거리였다. 9시 출근해서 6시 반 퇴근, 거기다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까지 더 길어지는 바람에 아이를 더 오래 맡겨야 한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내게 찾아온 기회가 너무 감사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막연히 꿈꿨던, 나는 언제쯤 내 차를 몰고서 미국 직장에 다녀볼까 하는, 그 아메리칸드림에 성큼 다가선 듯 말이다. 비록 한국 직장이고 얼마큼 영어를 쓸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모를 뿌듯한 이 마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출근 첫날이 성큼 다가왔다. 아침 일찍 서둘러 아이를 유아원에 보내며 짠한 마음 안고 하이웨이를 달렸다. 운전은 어떻게 실습을 해보았지만, 영어는 전화 영어 몇 마디 찾아서 중얼거린 게 다여서, 과연 리셉셔니스트로 내 몫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해,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낯선 안내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바로 내 옆에서 일을 가르쳐 주며 함께 데스크를 지키는, 업무 동지가 있다는 것이 든든했다. 나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지만 미국에 고등학교 때 이민 왔기에 영어도 잘하고 성격도 쾌활한 친구였다. 그와 함께 전화를 받고, 고객으로부터 온 이메일 답장을 해 주고, 직원들 출근표를 정리하고, 점심 식사 및 저녁 야근 식사 주문 등의 업무들을 익혀 나갔다. 제일 긴장되는 것은, 영어권 손님의 전화를 받는 일이었는데, 누구를 찾는지를 잘 듣고 잘 연결을 시켜주면 되기에 그다지 많은 영어가 요구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때로는 광고나 영업 목적으로 무작정 사장님을 연결해 달라는 전화들이 있기에 잘 분별하여 차단해야 했는데, 영어로 상대해야 하기에 제일 긴장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안 계시다고 둘러말하며 용건이 뭐냐고 물어보자 그 미국 사람이 "Terrific!" 하며 전화를 끊는 것이었다. "Terrible"도 아니고 "Terrific?"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아마 "자알 하는군~" 하며 비꼬듯이 내뱉은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지만 역시 잘 차단을 한 셈이겠지 나름 위안하면서 넘기기도 했다.



처음엔 누가 누군지 모르던 회사 사람들의 이름이 점점 익혀지고, 주어진 업무에 더 적응해 나가면서 마음은 더 편해졌다. 다만 안내데스크 자리는 비우면 안 되기에 교대할 사람이 없으면 화장실도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다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있었고, 이렇게 공개된 자리가 아닌 사무실 어딘가에 내 자리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절로 들기도 했다. 처음엔 안내데스크부터 시작하여 영업부나 다른 부서에 자리가 나면 옮길 수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쯤 그런 기회가 오려나 싶기도 했다. 신입이면서 벌써 그날을 꿈꾸면 사치이겠지~ 그 외에는 다 마음에 들었다. 일도 탈도 많은 여행사 사무실엔 때로는 거친 말들도 오고 갔는데, 이곳 사람들은 훨씬 신사적이고 친절했으며, 분위기도 좋았다. 아침엔 커피와 베이글, 크림치즈 등이 제공되고, 점심엔 매일 메뉴를 달리하여 한식당 아니면 중식당 등에서 주문하여 배달까지 해주어 점심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식사 주문이 내 업무 중의 하나였다. 점심이 되기 전에 전화기를 스피커처럼 들고 "점심 식사 주문 부탁드립니다" 하고 멘트를 날리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2주가 흘러갈 무렵, 인사 담당자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주 앉았는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 웨어하우스(창고) 부서 오피스 어시스턴트 자리가 났는데요, 소나 씨가 차분하게 잘 감당하실 것 같아 그 자리를 맡기려고 해요."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그 부서의 여직원이 학업 때문에 그만두게 되었다고 들은 게 생각이 났다. 사실 순서상 나보다 앞서 안내데스크를 지켰던 여직원이 그리로 가는 게 맞겠지만, 고민 끝에 그렇게 결정하게 되었다며 내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했다. 그곳에선 창고에서 필요한 오피스 업무를 감당하면서 영어권인 창고 직원들과는 다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자리이므로 한국 직장 속의 미국 직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아...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이 인생 기회에 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함께 일했던 옆의 직원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회사에서는 리셉셔니스트로서 그녀가 탁월하게 잘 감당하고 있기에 그녀가 필요하여 그 자리에 더 붙들어 둔 것이라며, 훗날 꼭 사무실 자리로 옮겨 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2주 만에 나는 안내데스크가 아닌, 창고 사무실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사무실과 바로 붙어 있는, 창고로 들어가는 문을 여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각종 가발 제품들이 쌓여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2층 창고 사무실로 올라가니, 내가 앉을 자리가 보였다. 주로 창고에서 일하시는 부장님과 과장님이 어쩌다 들어오시는 것을 제외하면 인적도 드문 조용한 곳, 나는 내 자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바로 창고로 나가면 마주치게 되는 외국인 직원들도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다. 내게 찾아온 믿기지 않은 이 변화 앞에 무한 감사하며, 그렇게 또다시 내 업무는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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