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일기 #15> 서바이벌 영어로 부딪혀 보자
'웨어하우스 오피스(Warehouse Office)' 하면 왠지 더 있어 보여서일까, '창고 사무실'이란 명칭보다 영어 명칭이 먼저 내 입에서 흘러나가곤 했다. 사실 영어와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미국 속의 한국 회사에서는 웨어하우스 부서가 회사에서의 공식적인 명칭이었고, 나는 그 안에서 오피스 어시스턴트(Assistant), 말하자면 사무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우리 부서에는 근엄하게 무게 중심을 잡고서 창고 직원들을 꽉 잡고 계시는, 그러면서도 마음은 따뜻한 부장님과, 아이디어도 많고 말씀도 많고 재미있으시나 불평도 좀 많으신 과장님이 양 축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두 분 사이를 오고 가며 때로는 하소연도 들어드리고 비위도 맞춰가며, 만들라는 서류 만들고, 물품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 가져다 드리고, 전화로 창고 물품 운송을 맡기는 등의 일을 했다. 특색이 참 다르고 의견도 다른 두 분이었는데, 그래도 나를 격려하고 배려해 주시는 부분들이 있어서 함께 일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두 분 다 늘 사무실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 창고에 많이 나가 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편했던 것도 있었다. 홀로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그 평온함과 즐거움이란! 안내데스크에 있어 보았기에 더욱 그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한국인 상사를 모시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내게 있어 제일 긴장되고도 신선한 일은 바로 창고 직원들을 대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직원들의 출근표를 정리하고 급여, 보험 등 복리후생을 도와주며, 야근 식사 주문을 하고 배급을 하는 일을 했다. 나중엔 인력사무소에 가서 직원들을 더 채용하는 일도 맡았다. 그래서 나중엔 남미와 동남아 직원들도 더 합세하였지만, 처음부터 창고에서 오래 일했던 친구들은 주로 남미의 '가이아나'라는 작은 나라에서 온 이민자 출신들이 대다수를 이루었는데, 아마 처음 들어온 누군가에 의해 소개를 받고 그 소개가 꼬리를 물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리라. 까무잡잡한 이들은 마치 인도 사람과도 흡사하게 생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인도인들이 그 나라의 반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가이아나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인데, 영국식과 짬뽕이 된 고유의 강하고 빠른 악센트가 들어가서 처음엔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일반 영어도 힘든데, 난생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발음의 영어 앞에 나는 더욱 좌절감을 느꼈다. 말하는 그들도 답답하고 못 알아듣는 나도 답답하고. 그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야근 식사를 주문받아 배분하는 일이었는데, 음식 앞에 달려드는 직원들을 잘 통제하지 못해 음식이 바뀌거나 모자라는 경우도 생겨 온갖 원성을 듣기도 했다. 정말 진땀 나는 순간들이었다.
좌충우돌하는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어 준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창고 직원들의 슈퍼바이저였다. 본래 이름은 더 길고 복잡하지만, 이곳에서 사용하는 그의 이름은 간단하게 '발(Bal)'이라 불렀다. 키도 크고 나름 인물도 훤칠한 그는 성실하고 친화력도 좋아서 회사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직원이었다. 업무상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처음엔 먼 나라 말인 것 같았던 그의 말이 어느덧 내 귀에 하나둘씩 들려왔다. 그의 영어는 다른 친구들보다 악센트가 심하지 않아서 그래도 적응하는 데 더 수월했다. 슈퍼바이저로 오래 일하면서 든든한 입지에 서 있었던 그였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속사정들을 하나둘씩 듣게 되었다. 다른 창고 직원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고, 한국인 상사의 눈에 벗어날까 노심초사하는 내면의 고민들을 말이다. 아직 독신인 그에겐 복잡한 첫사랑의 사연도 있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둔 그녀가 얼마 전 이혼을 한 뒤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면서, 그녀를 미국에 초청하고 싶은데 절차가 복잡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는 말에 속으로 그의 지고지순한 순정에 놀라기도 했다. 그의 이런저런 고민들을 들으며, 나의 짧은 말로 그를 위로하기는 벅차지만, 이야기를 들어주며 또 나누며 우리는 친구가 되어 갔다.
창고에는 가발을 만들고 수선하는 여직원들도 열댓 명 넘게 있었다. 역시 가이아나 출신들이 대다수였는데, 아이를 맡기고 악착같이 야근도 하며 맞벌이를 하거나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싱글맘들도 있어서 그들의 처지에 더욱 마음이 갔다. 여직원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주고, 애로사항들을 들어주며, 또 점심도 함께 나누며 끈끈한 정이 생겨났다. 처음엔 오피스 직원들과 같이 회사에서 시켜주는 점심을 먹다가 점심시간이 바뀌어 우리 부서끼리 식사를 하게 되면서는 나도 한국식 도시락을 싸갔는데, 주로 볶음밥, 카레, 불고기, 해물 볶음 등을 그들에게 먹으라고 권하면, 그 친구들이 맛있다며 잘 먹어 주었다. 나 또한 그들이 싸오는 인도식 볶음밥, 카레와 전병, 완두콩 소스, 말린 생선볶음 등을 맛보며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음식을 나누고 정을 나누는 점심시간은 하루 중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비록 내가 알아들을 만큼만 알아듣고 수긍하며 몇 마디 덧붙이고 물어보는 정도의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한다는 것이 내게는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비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처음에 알아듣지 못하면 내 나름대로 해석하여 다시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답을 듣고 나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더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식으로 나는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배워 나갔다.
사실 우리 부서의 투 톱인 부장님과 과장님도 그렇게 유창한 영어 실력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오셔서 식당에서 웨이터를 오래 하면서 영주권까지 받고 우직한 성실함에 사장님 눈에 발탁되어 창고 부서를 맡아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장님은 그 세월만큼 많은 사람들을 대해온 짬밥(?)만큼 의사소통은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할 말 다 하고 다 알아들으니 그 정도면 창고 직원들을 다루기에 충분한 실력이었다. 그에 비해 이민 온 지 오래되지 않아 영어가 더 짧은 과장님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고 늘 '굿모닝 팝스'를 들으며 거기서 배운 영어를 응용하였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매일 노력하고 있었다.
나도 이분들에게 도전을 받아 영어 공부를 시작하긴 했으나 다만 꾸준히 한다는 것이 쉽지 않긴 했다. 워킹 맘의 하루는 너무 바빴으니. 회사 일이 끝나자마자 유아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픽업하고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만들고 먹고 치우고 하다 보면, 다음 날을 위해 지친 몸을 누이기가 바빴다. 비록 제대로 공부할 짬도 없었지만, 말도 안 되는 영어로라도 자꾸 쓰고 부딪히는 사이, 내 안에 무언가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영어를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수줍음에서, 될 수 있으면 영어로 말하고 보는 자신감이 조금씩 찾아온 것이다. 돌아보면 미국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용기를 그때 많이 얻게 된 것 같다. 나처럼 조국을 떠나 멀리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찾아온, 어렵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꿋꿋이 짐을 나르고 가발을 만드는 다른 나라 이민자들, 각양각색 피부색의 창고 직원들을 대하면서 말이다. 정말 미국에서 일한다는 기분을 느끼며, 바쁜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