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일기 #1>
이민을 선택하고, 정든 나라를 떠나 미국 동부에서 10년, 그리고 서부에서 새로 둥지를 틀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만 해도 빽빽 울어대던 아기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고, 시작부터 '독수리'로 태어난 둘째도 초등학생이 되었다. 태어나 처음 살아보는 낯선 나라에서, 한국에서 살았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이 이민자의 현실과 심정을 글로 정리해 보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막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또 무엇을 위해 써야 할지 이유를 찾지 못해 계속 마음속으로 되뇌다가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인생이지만, 소소한 이민의 일상 가운데 느끼는 행복과 감사, 고민과 좌절 등을 기록하면서 나에게뿐 아니라 누군가에게도 인생의 용기와 웃음과 공감으로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그 어느 곳에 터전을 내리고 있든지 삶의 진실은 맞닿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용기 내어 그럼 시작해 보자.
2006년의 어느 봄날, 남편이 문득 이 말을 꺼냈다.
“우리 뉴욕에 가서 살면 어떨까?”
“갑자기 왠 뉴욕이에요?”
“응, 아는 형이 LA에서 회사를 운영하는데, 이번에 뉴욕 지사를 오픈한대. 매니저로 일할 사람을 급하게 구하고 있나 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뉴욕이라고? 세련되면서도 매혹적인 그 단어에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휘황찬란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새해마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폭죽 터지는 타임스퀘어 광장, 영화 속 멋진 배경의 센트럴파크 등이 내 머릿속에 줄줄이 펼쳐졌다. 그 세계적인 도시 뉴욕이라니,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가서 무슨 일을 하는 건대요?”
“물류업이야. 기업을 상대로 물건을 운송해 주는 통운 회사라 할 수 있지.”
“그럼 지금 하는 일이랑은 다른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뭐, 일은 다 적응하기 나름이니까.”
그의 직업은 IT 컨설턴트였다. 외국계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그만두기는 솔직히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비교한다면… 이때부터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 미국 이민을 떠나고 싶은 이유는
첫째, 원래부터 가고 싶었다. 이유가 우습지만 진짜 그랬다.
남편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7년간 캘리포니아에서 머물렀는데, 그곳에 대한 동경이 그에겐 가슴 한편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유학할 당시 아버지 사업이 힘들어져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고생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는 캘리포니아를 파라다이스였다고 추억했다. 가본 적도 없는 그곳을, 연애 시절부터 세뇌가 되어 나 또한 절로 동경하는 마음이 싹텄다.
어느 날은 사업 구상을 한 적도 있다.
“캘리포니아 바닷가에서 팥빙수 가게를 하면 어떨까? 이름은 ‘빙스(Bings)’라고 하고.”
팥빙수를 좋아하는 그 다운 발상이었다. 미국인들 입맛에 맞게 팥 대신 다른 것을 넣자면서. 그때는 그런 가게들이 미국에 없을 때여서 어찌 보면 선구자적인 아이디어였다. 그만큼 우리는 미국 라이프를 꿈꾸고 있었다. 다만 실행에 옮길 돈과 기회가 없었을 뿐.
그런데 갑자기 뉴욕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캘리포니아가 아니긴 했지만, 뉴욕은 또 나름대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뉴욕에서 살다가 캘리포니아로 옮길 수도 있을 테고. 찬스는 아주 좋았다.
둘째, 우리에겐 막 태어난 예쁜 아기가 있었다. 아이 교육을 생각하면 이민을 떠나고 싶었다. 한국의 치열한 입시제도와 경쟁적인 교육 환경, 주입식 교육, 사교육 등을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공부하도록 키우고 싶었다. 또한 영어 공부 힘들게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네이티브 스피커가 된다는 것만도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셋째, 남편의 직장생활이 바쁘고 힘들었다. 일의 강도도 세고, 프로젝트에 한번 투입이 되면 출장을 멀리 갈 수도 있고, 밤늦게 들어오는 일도 많고, 때로는 주말도 없었다. 그토록 예뻐하는 딸아이와 마음껏 놀아줄 시간도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한국의 직장 분위기는 가족을 고려하기보다는 일 중심적으로 느껴졌다. 반면에 미국은 가족을 우선시하는 문화라던데. 자연스레 우리의 마음은 미국 취업 쪽으로 기울었다.
- 이민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작은 이유로는 나의 직업이 있었다. 글을 쓰고 싶어서 국문과를 전공하고, 출판사와 잡지사를 다녔던 터였다. 일을 쉬면서는 창작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드라마 학교를 다니면서 습작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이민을 떠난다면 드라마 작가의 꿈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제대로 시작해 보지도 못한 채 이대로 접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꼭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이민의 경험을 토대로 무언가 새로운 글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영어가 메인 언어이지만, 미국 한인사회 속에서 한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이민을 망설일 이유만은 아니었다.
사실 주저되는 큰 이유는 부모님 때문이었다. 양가 부모님 모두 가까이 살고 계셨는데, 막 태어난 손녀딸을 금지옥엽 귀히 여기며 예뻐하시던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말씀드리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시아버님 건강이 좋지 않으신 상태였다. 정말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어렵게 어렵게 말씀을 드리게 되었다.
“뉴욕의 물류회사에서 일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는데요…”
“그래, 잘된 거야. 얼마나 좋은 기회니. 당연히 가야지.”
양가 부모님 모두 떠나는 길을 축복해 주셨다. 사랑하는 자식 내외와 손녀를 멀리 보내야 하는 슬픈 마음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시고, 자식의 장래만 생각해 주시는 그 사랑…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시댁 쪽으로는 남편의 큰누나와 큰형 식구가 이미 시카고에서 터를 잡고 있었다. 우리마저 떠나면 작은 누나네 식구만 부모님 곁에 남게 되니,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나중에 미국으로 부모님을 모셔오는 게 어떨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느 방향이 되었든, 우리가 가서 잘 정착하는 게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민을 선택했다. 인생의 기회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