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일기 #3>
플러싱 복잡한 거리 한복판의 고층 아파트에 얻게 된, 방 하나짜리 우리 집. 2006년 당시 시세로 1,200불 정도 되는 월세(지금은 물론 더 비쌀 테지만)에 주차장 사용료도 따로 내야 했으니 뉴욕의 비싼 물가를 처음 실감했다.
한국에서 이삿짐을 가져오긴 했지만 서랍장, 식탁 등 가구들과, 한국과 코드가 다른 전자제품들은 모두 새로 구매해야 했다. 그중 TV를 사러 어디를 갈까 하다가 미국에서 규모가 큰 전자제품 체인점으로 향했다. 남편이 사고 싶어 하는 TV는 2006년 당시만 해도 핫한 삼성의 플랫형 TV 였다. 사이즈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가격은 1,000불을 넘는, 우리에겐 고가의 전자제품이었다. 그래도 빠르게 진화하는 전자제품 추세에 적어도 이 정도 품질은 되어야 한다 해서 큰 맘먹고 구매를 결정했다.
이제 계산만을 남겨둔 상황. 남편은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 계산원이 신분증을 요구했고, 남편은 앞서 발급받았던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뉴욕으로 바꾸기 전이라 캘리포니아 것을 내밀었다. 계산원은 면허증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휘어보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 신분증은 가짜라서 결제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너무 황당해서 따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 그녀는 자신의 뉴욕 운전면허증을 꺼내더니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큰 차이점은 뉴욕 면허증이 딱딱하여 휘어지지 않는 데 반해 캘리포니아 면허증은 잘 휘어질 만큼 부드럽다는 점이었다. 그것 때문에 가짜란 말인가? 너무나 아이 같은 발상에 기가 막힌 남편이 "당신이 캘리포니아 면허증을 본 적이 있냐" 하니 자신은 본 적 있다며 우기는 것이다. 화가 난 남편은 매장 매니저를 불러달라고 했고, 우리는 그가 이 억지주장을 끝내 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는 그 면허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 한참 만에 나오더니 이것은 가짜라 인정할 수 없다며 그 계산원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남편은 "오케이, 그럼 경찰을 부르겠다"라고 했다. 그는 진짜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 한참 후에 경찰이 도착했고, 운전면허증을 꼼꼼히 살펴보더니 이것은 진짜라고 증명해 주었다. 남편은 저들이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반으로 확 구겼다며 그것도 항변했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갸웃거렸다. 신분증에 대한 억울한 오해는 풀어졌지만 그 매장 직원들은 진심 어리게 사과를 하지도 않았고, '아님 말고' 정도의 태도를 보였다. 참 어의 상실이었다.
소극적인 나의 성격으로는, 더욱이 영어도 잘 못하기에 속으로 욕하며 그냥 돌아섰을 텐데, 부당한 대우에 격분하여 경찰까지 부르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한 남편도 대단해 보였다.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우리가 우리 돈 주고 TV를 사겠다는데, 환영하기는커녕 가짜 신분증 소유자로 몰다니. 우리가 별로 돈 없어 보이는 동양인이어서 더욱 그랬을까. 앞서 문제를 일으켰던 고객들의 전례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다고 우리도 싸잡아 이런 대우를 받을 줄이야... 이민자의 설움, 미국에서의 첫 씁쓸한 경험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억울한 마음에 본사에 항의 메일을 보낼까 하다가 그나마도 참고 지나갔다. 요즘 같아서는 바로 SNS나 게시판에 항의글을 올려서 부당함을 널리 알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잘못된 것을 정정하기 위해 좀 더 행동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지금까지도 남는다. 그때도 그랬지만 사실은 더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가 영어 때문인 경우가 아주 많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바로 따지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이민 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여러 경우를 만나 때로 크거나 작은 손해도 보게 된다.
남편은 말한다. "이민 왔으면서 영어 못하는 거 당연하잖아. 그 사람들도 영어 못하는 거 다 아니까 알아서 들을 거야. 그러니 겁먹지 마. 특히 여기선 자기 할 말은 당당히 할 수 있어야 해." 남편의 당당함에 기대어 나는 좀 더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는다. 부당한 대우에, 잘못된 오해에 맞설 용기를, 행동할 때 행동해야 하는 용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