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량 남편을 꿈꾼다.

소원을 말해봐. 이루어주는 지니가 될게.

by 권정희

추운 겨울이다.

우리 집 맥가이버는 추운 날은 추운 데서, 더운 날은 더운 데서 일한다.

게다가 출근 시각은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다.

아침나절 아이들 밥을 해 먹이고, 유유자적 노트북 가방을 챙겨 들고 단골 카페로 출근하는 나.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우아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럭셔리 작가'의 삶을 사는 나와 그는

참으로 대조적인 하루를 보낸다. 그래서 늘, 문득문득 미안하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한 달 한 달 성실히 일궈오는 우리집 맥가이버의 월급 덕분에,

아이들은 영어 학원에도 가고 운동도 배우며,

금요일마다 고대하는 '엽떡 데이'를 만끽한다.

무엇보다 내가 경제적 조바심 없이 마음 편히 글의 세계를 유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의 덕이다.

가끔 내 작품 계약이 체결되어 목돈이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함께 환호하며 여행을 계획하곤 한다.

이 모든 소소한 행복의 밑바탕에는 그의 무거운 어깨가 있음을 안다.

그래서 늘, 절실하게 고맙다.


그가 홀로 출근 준비를 할 때면 나는 단잠에 빠져 있고,

내가 카페 퇴근 후 집 정리를 마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을 때면

그는 지친 몸을 뉘어 잠을 청한다.

우리집 맥가이버는 육체를 쓰고 나는 정신을 쓰며, 그는 회사에서 나는 집에서 각자의 전장을 지킨다.

하지만 안다.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의 삶이 훨씬 더 고되다는 것을.


우리 집 맥가이버는 못 하는 게 없다.


전자 도어록 교체부터 전등 수리, 전기 배선은 물론이고 막힌 변기도 그 앞에서는 항복이다.

장모님 댁 순간온수기와 인덕션까지 척척 설치해 내는 그를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뿐인가. 요리 실력은 거의 미슐랭 셰프 급이다.

김밥 마는 솜씨는 장인 수준이고, 골뱅이와 꼬막 무침은 입에 넣는 순간 예술이 된다.

심지어 집에서 감자탕을 끓이고 족발까지 삶아내니,

그야말로 완벽한 남편이다.

단지 설거지 상태가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옥에 티'랄까.


다시, 추운 겨울이다.

거친 현장에서 추위와 더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남편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하다.

남편을 추운 날엔 따뜻한 곳에, 더운 날엔 시원한 곳에만 있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더 치열하게 문장을 적어 내려간다.

그럴 때면 남편은 씩 웃으며 말한다.

"고마워. 내 생각해서 열심히 글 써줘서."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열렬히 맹렬히 자판을 두드린다.

내 인생의 목표는 진정성 있는 작가, 선한 영향력을 주는 작가가 되는 것이지만,

또 다른 절실한 목표는 따로 있다.

우리집 맥가이버를 계절의 횡포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

더 나아가,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한량'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가 멋지게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돌아오는 그날을 즐겁게 상상해 본다.


오늘도 우리집 맥가이버는 새벽어둠을 뚫고 출근길에 올랐다.

다행히 어제보다 날이 좀 풀렸다니 마음이 한결 놓인다.


- 맥가이버 남편, 조금 더 버텨줘.

내 원고가 당신의 사표가 되는 그날까지 나도 멈추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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