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달도 뜨지 않는 영원의 밤

by 루이덴


그의 밤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달도 뜨지 않는 그의 밤에는 비가 내렸다. 아주 많이.


투둑, 툭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아침인지 새벽인지,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회색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쳤다. 그나마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던 빛 마저 차단되니 방 안엔 어둠만이 남았다.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빗어낸 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찬장을 열어 원두 봉투들을 가만 바라보다가 가장 홀쭉해진 봉투를 꺼냈다. 그라인더에 남은 원두를 붓고 덜그럭, 덜그럭 갈아 낸 뒤 드리퍼로 옮겨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귀찮지만 뭔가 전문가 같아지는 기분에 우쭐하게 되는 핸드 드립. 비워낸 원두 봉투는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고 봉투 채 방치되어있던 꽃다발을 꺼내 들었다. 꽃집 언니가 물 주머니를 꼼꼼히 챙겨주어 비교적 멀쩡한 노란 튤립 한 발. 그럼에도 밤새 방치된 상황에 항의라도 하 듯 조금 풀 죽어있었다. 꽃가위를 꺼내 가볍게 다듬어준 뒤 탁자 위의 빈 화병에 물을 반쯤 채워 꽃을 꽂았다. 포트 가득 내린 커피의 향이 좋았고 통유리로 되어있는 거실에는 약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둠에 싸인 침실과 희미하게 밝은 거실 중 어디가 내 자리일까 고민하며 커피 한잔을 손에 그러쥔 채 기다렸다. 어쩌면 구름이 걷히기를. 어쩌면 비가 그치기를.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커피 한잔을 비우면서 기다리기로 했다.


커피의 따뜻한 온기 때문이었을까, 잠깐씩 졸다가 멍한 정신으로 문득 벽에 걸린 그림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그림을 완성한 게 아마도 작년 여름이니까,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봄을 향해 가는 지금 이 순간, 새로운 그림을 작업하기에 딱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도 그쳤는지 거실에 들어오는 햇빛이 좀 더 강해져 있었고, 포트에 커피는 남았지만 비워진 컵만 싱크대로 들고 가 깨끗하게 씻어서 찬장에 곱게 넣었다.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다가 아직 공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끝없는 어둠은 어떤 기분인가. 달도 별도 뜨지 않는 그의 하늘을 다시금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들이치는 햇빛을 조금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한쪽 구석에 놓아둔 이젤과 캔버스를 꺼내왔다. 그림을 그려야지. 벽에 새로 걸 수 있는 그림을. 검은색으로 바탕을 깔고, 하얗고 노란 물감을 손으로 튀기듯 뿌려냈다. 중간중간 파랗고 빨간 불꽃도 그려 넣고,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억지로 별빛을, 달빛을, 햇빛을 욱여넣었다. 바깥은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집 안엔 아직도 겨울의 메마름과 춥고 싸늘함만이 가득해 준비되지 않은 따뜻함이 두려워졌다. 해가 조금 더 밝아지고 그림이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갈 때 즈음에서야 음식을 달라는 위의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붓을 내려놓고 물감으로 범벅된 앞치마를 벗어 이젤에 걸어둔 뒤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게 있는지 확인했다. 계란, 우유, 물. 계란 두 알과 우유를 꺼내 들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다. 타닥, 닥. 식탁 위에 굴러다니는 아보카도를 집어 꼭지 부분을 손끝으로 눌러보았다. 푹신하게 들어가는 껍질이 후숙이 아주 잘 되었음을 알려주었고 순간 미소가 피었다 사라졌다. 계란과 우유를 섞어 곱게 쳐내고, 나무 주걱으로 휘휘 스크램블을 만든 뒤, 카운터의 빵 봉지에서 식빵 두장을 꺼내 토스터에 넣고 타이머를 맞추었다. 포슬한 계란과 납작하게 썰린 아보카도가 담긴 접시 위로 후추를 양껏 뿌리고 바삭한 식빵을 올린 접시도 함께 들고 식탁에 앉아 오늘의 첫 끼를 시작했다.

설거지까지 마친 뒤에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작업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감 묻은 앞치마를 세탁 바구니로 옮겨 넣고 붓과 팔레트를 씻어내 정리했다. 내일 바로 다시 작업할 수 있게 이젤은 치우지 않기로 했다. 아직도 커피포트에는 아침에 내렸던 커피가 남아있었고, 꽃병에 꽂아둔 해맑던 튤립은 너무 늦어버렸는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와 시들어 버린 꽃. 역시 어제 사 오자마자 병 꽂이를 해줬어야 하는데,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찬장에서 새로운 잔을 꺼내 식어버린 커피를 데우지 않고 따라서 그대로 한잔 비웠다. 식어버린 커피는 아침 첫 잔의 맛을 따라오지 못했고, 남은 커피는 결국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싱크대로 흐르는 검은 물의 색만큼 그의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고 나의 기다림은 더 길어졌다. 문득,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은 영원하다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결국 영원은 있다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했다. 커피포트와 잔을 마저 치운 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창 밖 풍경을 가만히 내다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이 순간이 조금은 서글프다고 생각하며 아무 음악이나 재생시켰다. 사라져 버린 것 들 중 하나인 CD 플레이어를 아직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쓸데없는 자부심을 느끼며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영원한 건 없으니 나의 기다림도 언젠가 끝이 보일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다시 또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