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나는 좀 더 자상하게 인사해 줄 수 있었을까.
“그만하고 싶어.”
읽고 있던 책을 덮은 그녀가 말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토요일 오후 3시에 그녀와 단골카페를 찾아와 각자 가지고 온 책을 읽고 있던, 여느 때 와 다름이 없는 데이트였을 뿐이었다. 다리를 꼰 채, 그녀와는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앉아있던 나는 책을 덮고,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손 끝을 바라보며, 네일 아트를 새로 받았구나 따위의 생각을 잠깐 하다가 멍청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만하다니, 뭘?”
순간 그녀의 눈빛을 스쳐 지나는 허무함인지 한심 함인지 시선을 파악할 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조용히 책을 챙겨 일어났다. 반짝이는 손톱들이 사라지고, 그녀의 걸음이 멀어지며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혔을 즈음에서야 나 역시 아무렇게나 덮어 둔 책을 가방에 넣고 거리로 나섰다.
카페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의 시선을 느낀 그녀도 이쪽을 쳐다보았다. 고집스럽게 앙다문 입과 자그마한 가방 속에 삐죽이 튀어나와 있는 책 한 권. 책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벌레를 털어내듯이 책을 꺼내 정류장의 벤치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가만히 다시 나를 쳐다보았는데, 내가 무언가 말을 해주기를, 무언가 행동을 취해주기를 바라는 듯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알았다 하더라도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윽고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도착했고, 치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조금 주저했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단호한 동작으로 몸의 방향을 돌렸기에 나 역시 그저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둘이서 손잡고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었을 그 버스가 그녀를 태우고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버스가 떠나고, 그녀가 서 있던 자리로 다가간 나는 그녀가 벤치에 두고 간 책을 주워 들었고, 그 순간에서야 이 책과 같이 나도 버려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버리고 간 책은 언젠가의 데이트 때 내가 추천해 주었던 소설이었다. 내가 가지고 나온 책이 이미 상당히 두꺼웠던 데다, 대충 집어 들고 나온 에코백은 사이즈가 크지 않아서 그녀가 두고 간 책까지 넣으니 가방은 볼품없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버림받은 책을 차마 두 번 버릴 수는 없어서 억지로 욱여넣고, 다시는 오지 않을 카페를 한번 더 바라본 뒤 그녀를 태운 버스가 떠난 반대방향의 지하철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끝을 원했지만, 그게 정말 그녀의 진심이었는지는 이제 알 수가 없게 되었고, 한 번이라도 진심이냐고 물어보는 대신에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주면서 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역 바로 앞의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가방 가득 책이 있는데 또 서점이라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내 발걸음은 소설/시/에세이 코너로 향했다.
이달의 신간, 금주의 화제작 등의 가판대를 지나 작가 이름순으로 책들이 정리되어 있는 책꽂이 앞에 섰다. ㄱ부터 ㄷ까지 하나의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나’로 시작하는 작가의 이름을 눈으로 좇으며 책을 찾았다. 작가의 이름은 찾았으나 내가 보고자 했던 제목이 눈에 띄지 않아 결국 서점을 두리번거리며 검색 대를 찾았고, 결국 컴퓨터에 제목을 입력하여 [매장 재고: 0]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은 허탈해지면서,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의 무게가 새삼 느껴졌고, 아까 제대로 마시지 못한 커피가 생각나서 카페인 충전이 절실해졌다. 서점은 1층에 있었고, 지하 1층에 카페가 있음을 확인한 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생각보다 한가한 카페에 감사함을 느끼며, 샷을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카운터에서 가장 먼 구석 자리에 앉았다. 커피는 금방 나왔고, 상냥한 미소의 직원이 가져다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잠시 넋을 놓았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커피를 마시다 보니 몸이 식고 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가방에서 책을 꺼냈고, 그녀가 버리고 간 책을 보면서야 ‘나 오늘 차였구나’라고 다시 깨닫게 되었다. 조금은 심한가,라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나는 정말 최악의 남자친구였을 거라 후회하게 되었다. 그녀와는 꽤 긴 시간을 함께 했고,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아늑했고,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게 좋았기 때문에 언젠가 분명 결혼을 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끝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그런 사실이 나와의 인연을 끊어야만 한 그녀에게 너무 죄스럽게 느껴졌다. 답답해진 속을 풀어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번에 들이켜고, 카페를 나왔다.
실내의 찬 공기를 머금은 몸으로 밖으로 나오니 체감 기온은 딱 좋았다. 몸이 금방 달아오를 것을 생각하고 재빠르게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다. 두 정거장이면 집에 도착하니까, 나쁘지 않다. 덜컹이는 지하철을 느끼며 서 있다가 문득, 카페에서 꺼내보다가 그대로 두고 나온 책이 떠올랐다. 두 번 버림받은 책. 그녀와 헤어졌다는 사실 보다, 한번 버려진 책을 또 버렸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