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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는 신입사원 시절, 회사 동호회에서 만났다. 이제 막 학생 티를 벗어던지고 갓 취직하여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여 유머라고는 전혀 없던 시절, 사수가 “우리 회사는 동호회 하나는 꼭 들어야 해.”라고 해서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억지로 고르고 골라 들어간 곳이었다. 회사 규모에 비해 동호회는 그리 종류가 많지 않았고, 주말 활동이 많은 봉사 동호회와 팀장님이 속해 계시는 동호회만큼은 제발 피하자는 생각으로 목록들을 훑다가, 독서 모임 동호회를 선택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또래 남자애들과는 다르게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노는 것보단 시원한 실내에서 책 읽는 것을 좋아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한 달에 한 권 정도라도 꾸준히 독서했으며,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독서는 놓지 말자고 다짐했었다. 나름의 독서 노트도 작성하는 등 꽤나 진지한 취미였기에, 독서 모임이라면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느낌 없이 회사 동호회 활동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독서 모임 동호회는 주말 모임이 없는 대신 점심시간에 회의를 했다. 주 1회, 매주 목요일 12시부터 1시, 영업 5부 대회의실. 격주도 아니고 매주라… 간혹 점심시간에도 일을 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일 때문에 참석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가입 서류를 작성해 제출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내 동호회 가입은 필수가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사실 당연한 일인데, 당시의 나는 사수가 하는 말이라면 그게 법인 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간대도 아마 동호회 가입을 했을 것이다.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가입을 환영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다음 회의 때 가져와야 하는 도서의 제목과 출석 체크 시스템 등 동호회의 간략한 규칙 안내가 적힌 메일을 받았다. 이 동호회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호회장이신 차장님은 우리 팀과 교류가 거의 없는 부서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달에 읽은 책은 나에게 이미 있는 책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퇴근하자마자 해당 책부터 챙겨두었다.
그 후 며칠간의 야근이 지나고 드디어 첫 독서모임 날, 내가 독서 동호회에 가입했다는 걸 안 팀원들은 신기해하며 후기 알려달라고 했다. 회의 장소인 대회의실로 이동하면서, 점심시간까지 포기해 가며 독서 모임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어쩌면 나처럼 사수들의 등에 떠밀려 억지로 적당한 모임을 고른 신입들일 수 도…
“독서 동호회 회의 오셨나요?”
가만히 생각에 잠겨 걷는 내 뒤에서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단어만큼 그녀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설명해 줄 말을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순간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목소리의 이미지와 정말 딱 맞아떨어지는, 머릿결 좋아 보이는 긴 생머리에 하얗지는 않지만 깨끗한 피부를 지닌, 차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가 서있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고, 그날 이후 독서 동호회는 내 짧은 회사 생활의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동호회 활동 한 달 차가 되었을 때 괜히 공짜 표가 생겼다며 그녀에게 영화를 보자고 했다. 언젠가 퇴근 시간을 맞춰 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카페에서 합류하여 영화 시간까지 커피 한잔 하고, 그 주의 모임에서 읽었던 책 얘기를 조금 나눈 뒤 도로변의 영화관으로 시간 맞춰 이동해 팝콘과 음료수를 주문했다. 대중들뿐 아니라 문화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는 그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 옆에 앉아 조용히 팝콘을 집어먹으며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눈이 너무 예뻤다는 것 만이 그날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동호회 활동 석 달 차 즈음에는 나와 그녀는 나이뿐 아니라 혈액형이 같고 둘이 똑같이 외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되었으며 종종 주말에도 만나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만나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일기장에 그녀에 대한 감상을 기록했다. 일기를 쓰면서도 떨리는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주말, 국제도서 전을 같이 관람한 뒤 전시장 뒤 편의 카페에서 그날의 소회를 풀던 중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사귀는 거 맞지?”
커피를 들이켜던 중 예상치 못한 돌직구에 사래가 들려 꼴 사납게 기침을 해대는 나를 보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순간 심장이 관자놀이에 달린 것 마냥 머리가 쿵쿵 울리기 시작했고,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내려놓고 양손을 꼭 쥔 채 그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똑바로 말했다.
“우리 사귀자.”
한 번도 우리의 사이를 정리한 적 없는 상황에서, 그녀의 질문에 옳다구나 하고 응 맞아라고 대답해주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먼저 얘기를 했어야 할지 모를 그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게 한 게 미안했고, 나의 말에 좋다고 대답하며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을 평생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순간은, 끝이 난 지금까지도, 내 온 마음을 다 한 진심이었다.
무엇이 변한 걸까.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한 걸까. 서점을 나와 목적지 없이 걷다가,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없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묵직해진 가방을 대충 내려두고 머릿속에 떠오른 그녀와의 첫 만남의 그날을 그저 계속 머무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작도, 끝도, 결국 그녀가 먼저 말하게 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왜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평생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그녀의 마음을 내가 어딘가에서 놓쳐버렸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녀를 만나게 해 준 나의 첫 회사는 퇴사한 지 오래였고, 이직과 퇴사를 반복하다가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시간 동안 그녀가 어떤 마음고생을 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끝없는 혼란만이 가득한 나의 인생 속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내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릴 때에도 그녀는 우리가 만난 그 회사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어느새 소 팀장의 역할까지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당연히 힘듦과 외로움이 있었을 텐데, 나는 그녀의 내면과 생각에 관심을 가져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그녀는 당연한 존재였기 때문에 – 그렇다고 그녀를 무시했다거나 우습게 봤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 언제나 그 자리에서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고 지탱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지막을 얘기하며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건 어쩌면 더 이상은 너의 버팀목이 되어줄 생각이 없다는 어떤 단호함이었을지도 몰랐다.
책상에 올려진, 언젠가의 기념일에 둘이서 케이크를 들고 찍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액자를 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