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 05. 12 일기
백수가 되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직서를 제출한 건 내 쪽이니까 퇴사가 맞겠지. 아무튼, 백수 1일 차에는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일단 나왔다. 야근도 많았고, 주말 출근을 해야 할 때도 있어서 평소 카페도 마음 편히 못 다녔기에, 언젠가부터 가보고 싶어서 지도에 표시해 두었던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며 책을 읽어볼 생각으로 가볍게.
역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내 눈앞에 보인 것은, 어느 연예인의 생일을 축하하는 전광판이었다. ‘이예준의 27살을 축하해!’라는 문구와 함께, 해당 연예인의 사진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갔다.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사진들을 바라봤다. 아무리 연예인에 관심 없는 나이지만, 그런 나 조차도 알 수밖에 없는 – 텔레비전이건 인스타그램이건 유튜브건 그의 얼굴이 안 나오는 곳이 없기에 – 아이돌이었다. 얼굴은 익숙한데 이름은 낯설어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활동명은 윤우현, 이예준이 본명이었다. 이름과 전혀 상관없는 활동명은 어디서 온 걸까. 그나저나, 스물일곱 살이라니. 나랑 동갑이네. 같은 나이 다른 삶, 뭐 이런 건가… 대중에게 사랑도 많이 받고, 돈도 많이 벌고, 참 부럽다. 한참을 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슬라이드 속 얼굴을 바라봤다. 슬라이드마다 머리색이 달랐다. 금발이었다가 푸들 같은 갈색 파마머리였다가 새까만 흑발이었다가 푸른색의 그라데이션이 화려한 은발까지, 두피가 남아나질 않겠네 싶었다. 화려한 머리 말고 내 시선을 붙잡아둔 건 또 있었는데, 바로 미소였다. 화려한 머리에 절대 가려지지 않는 예쁜 미소. 그런데 의외로 웃는 사진이 많지 않네,라는 시답잖은 생각과 함께, 다시 맨 처음 생일 축하 메시지로 영상이 돌아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을 나와서 미리 생각해 뒀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평일 낮이어서 인지 카페는 매우 한적했고, 나 외에 손님이라곤 카운터 앞 쪽 테이블의 두 명의 남자들이 뿐이었다. 검은색 버킷햇부터 검은색 워커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게 차려입은 남자는 심지어 검은색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다. 그 옆의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는 깔끔한 남색 정장과 대비되는 턱수염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카페를 오는 게 이상할 건 없지만, 그 둘의 차림새가 카페와 매우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기에 뭔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키오스크로 시선을 돌렸다. 다양한 메뉴들을 한참 스크롤 하다가 카페의 시그니처 라테 한 잔과 버터토스트를 주문하고 알림을 받을 핸드폰 번호를 입력한 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사다리꼴 모양의 공간이 조금 독특한 카페는 다양한 화분들이 잘 어우러진 모던한 인테리어로 유명했다. 바로 어제 그만둔 회사가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였기에 사무실에는 각종 인테리어, 아키텍처, 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다양히 구비되어 있었고 그중 특히 나는 인테리어 잡지 보는 것을 좋아했다. 요즈음엔 인터넷으로 쉽게 정보를 찾아볼 수 있지만 어째선지 나는 실물 책을 직접 짚어가며 보는 것을 선호했다. 회사에서 보다가 마음에 드는 잡지는 따로 서점에서 구매해 집에서 스크랩을 하기도 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몸 담고 있는 업계에 대해 애정이 없지는 않았다. 오늘 찾아온 이 카페 역시 회사에서 보던 잡지에서 알게 되었고, 깔끔하면서도 포근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 두고 언젠가 가보자 했다. 그게 퇴사 후가 될 줄은 몰랐지만.
카페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아담한 편이라서 카운터에서 최대한 멀리 자리를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운터 앞 남자 손님들의 대화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거리였다. 핸드폰을 꺼내 카페 사진을 찍고, 챙겨 왔던 책도 꺼내 올렸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신간. 어제 퇴근길에 – 퇴사 길에 – 들린 서점에서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매한 책이었다. 필사도 할 겸, 펜과 노트도 꺼내 펼치고 괜히 사진 한 장 찍은 뒤 독서를 시작했다. 한 3페이지쯤 넘어갔을 때 픽업 안내 문자가 와서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에는 당황스럽게도 아메리카노와 버터토스트가 올려져 있었고, 그냥 먹을까 고민하다가 사장님께 영수증을 보여드리며 시그니처 라테 주문했는데요 –라고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 사과하시며 다시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겠다고 했다. 카운터에서 계속 기다리면 부담스러우시려나 싶어 토스트 접시가 올려진 트레이를 들어 방향을 틀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올 블랙으로 차려입고 있던 그 사람은, 바로 조금 전 내가 전광판에서 보고 온 얼굴이었다.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우와'를 겨우 삼킨 채 괜히 혼자 깜짝 놀라 황급히 눈을 피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토스트 위에 적당히 녹아있는 버터를 펴 바르며 책을 이어서 읽고 있은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정말 죄송합니다, 시그니처 라테 드릴게요! 란 사장님의 활기찬 인기척에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인사를 드리고 다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카운터 자리의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자의식 과잉인가, 착각이겠지… 싶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몸의 방향을 좀 더 카운터의 반대쪽, 창가 가까이로 돌린 뒤 다시 책을 읽었다. 이 모든 게 순전히 내 착각이고 애초에 다른 사람일지도, 란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곧 좋아하는 작가의 필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크림이 일품인 달달한 시그니처 라테에 두툼하게 썰려 바삭한 토스트로 배까지 채우고 나니 기분 좋은 졸음이 몰려왔다. 정신 차리자고 생각했지만 이미 노곤해진 정신은 개운해지지 않았고, 떠지지 않는 눈으로 내려다본 필사 노트에는 지렁이들이 꼬불거리고 있었다. 도저히 집중은 안 되겠구나 싶어 책갈피를 꽂아 덮고 잠시 눈을 감았다. 턱을 괴고 눈을 감고 있자니 정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고 고개를 꾸벅인다는 느낌이 든다 싶을 때쯤, 무언가 내 옆통수에 닿았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비몽사몽 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검은색의 버킷햇을 쓴 그 가서 있었다. 한 손은 나의 옆통수와 유리 사이에 뻗쳐있었고, 반대쪽 손에는 작은 손거울이 들려있었다. 앗, 죄송합니다 사과하며 황급히 가방 속 파우치를 꺼내 내 거울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어.. 제 거울 아닌데… 다른 분께서 떨어뜨리신 것 같아요.”
라는 내 대답을 듣자 아, 그래요. 하며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카운터 자리로 돌아갔다. 아까까지 같이 있던 남색 정장의 턱수염 사내는 자리에 없었다. 졸음이 채 가시지 않아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카운터 뒤의 사장님께서 발견하시고 살짝 웃으시는 게 보였다. 나도 마주 웃어 보이며 여전히 가시지 않는 졸음에 계속 카페에 있다가는 잠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비운 접시와 유리잔을 트레이에 올려 카운터에 반납하고 돌아서다가 문득,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여전히 마스크를 쓴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앞에 서자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전광판 속 4-5개의 슬라이드 속에 지나간, 미소가 예쁘지만 잘 웃지 않는 그 아이돌이 맞았다.
“그… 역에서 전광판? 봤어요.”
“아, 네.”
“어… 그러니까… 음... 생일 축하 드려요.”
내 축하 인사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인 그는 순간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아아, 고맙습니다,라고 내뱉듯이 인사했다. 애초에 말을 걸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나의 충동적인 행동에 제일 놀란 건 나였고 딱히 기대한 리액션도 없었지만 심드렁한 반응에 이유 모를 머쓱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지났어요.”
짐을 챙겨 카페를 나와 지도앱을 켜고 예약해 둔 전시장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세시의 햇살이 조금 더웠는지 버킷햇을 벗고 서있었다. 마스크는 여전히 쓴 채였다. 회색과 카키색, 그리고 얼핏 보이는 초록색 등 차분한 듯하면서도 화려하게 염색된 머리카락들이 전광판 속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돌은 아이돌이구나, 머리색이 엄청나네. 생각하며 무슨 말이지? 란 눈으로 쳐다보니까 바지 주머니에 양쪽 손을 모두 찔러 넣으며 다시 말한다.
“내 생일, 지났어요.”
“아… 죄송해요, 전광판 때문에.. 오늘인 줄 알고.”
“그 광고, 두 달 전부터 걸려있었는데. “
와 생일 축하 광고판을 두 달 전부터 걸어둔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지났다고? 근데도 안 내려갔다고? 그럼 총 광고 기간을 얼마로 잡았다는 거지? 회사에서도 언젠가의 회의에서 보다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 거래처들이 몰려있는 구역의 지하철역에 홍보 포스터를 걸어보고자 단가를 알아본 적 이 있었다. 아무리 최소 사이즈, 최단기간으로 알아봐도 비용 부담이 커서 포기했던 게 생각이 났다. 아이돌 팬클럽의 화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뭐라 반응도 못하고 황당하여있는데 그는 걸음을 옮겨 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두 발짝 가까워진 그는 생각보다 키가 컸고, 의외로 마르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나를 살짝 내려다보며 서있던 그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던 찰나,
“우현아, 출발하자.”
라는 말과 함께 한참을 보이지 않던 남색 정장의 남자가 나타났다. 활동명으로 부르는걸 보니 매니저인 걸까, 따위를 궁금해하는 나와 살짝 눈이 마주친 그 사람은 잠깐 멈칫했고 바로 경계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아마도 연예인을 알아본 팬이 그를 귀찮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한 누명을 쓰고 싶기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시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찾아보며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