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한숨만 잘게

by 루이덴


슬퍼하지 말고, 미안해하지 말고,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날, 날씨가 어땠더라. 햇빛이 맑았었지. 응, 꽤 포근할 거 같다고 생각해서 진회색 니트 가디건 한 장만 걸치고 나갔던 걸 기억해. 청명한 파란 하늘 때문에, 오늘은 꽤 따뜻하겠다고 생각했었어. 막상 문을 열고 나서니까, 살을 에는 것 같은 칼바람에 옴짝달싹 못하고 굳어있었지만. 네가 사준 남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집에 다시 들어가서 코트로 갈아입을까 하다가, 큰길로 나가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져서 그대로 걸음을 옮겼던 것 같아. 주머니에 찔러 넣은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며, 네가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걸음을 재촉하며, 네가 좋아하는 노래의 한 구절을 휘파람으로 불어대며. 하지만 해가 닿는 큰길로 나와서도 상태는 마찬가지여서, 응, 너에겐 미안하지만 모퉁이에 위치한 카페에 잠시 들렀었어. 도저히 너무 추워서 안 되겠더라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니까 좀 살 것 같더라. 마음 같아서는 너에게 연락해서 쇼핑은 그만두고 이쪽에서 만나자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니까.


어쨌거나 나는 시린 손을 불어가며 줄에 서서, 중간 사이즈의 카푸치노와 카페모카를 한 잔씩 시켰지.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너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어. 그러다가 카페 건너편에 위치한 가게를 보게 된 거야. 워낙 회사 집 회사 집 만 다니느라 동네 구경을 잘하지 않아서인지, 사실 이 카페 외에는 뭐가 있는지 잘 모르거든. 웃기지? 이곳에서 산지 벌써 3년인데. 어쨌든, 카푸치노와 카페모카를 들고 나와 신호가 바뀌기를 한동안 기다렸다가 – 이시간즘에 여기 교통이 어떤지, 너도 잘 알겠지 - 길을 건너서 가게에 들렀어. 이미 늦는 거, 네 선물이나 사들고 갈까 싶어 진 거지.


가게는 외관 못지않게 내부도 멋졌고 꽤 멋스러운 가죽시계들이 진열되어 있는가 하면, 푸근해 보이는 목도리들도 선반 가득 있었어. 목도리는 조금 고민이 되더라. 넌 봄날의 초록색을 좋아하는데, 뭐랄까, 이 가게엔 탁한 카키색밖에 없었거든. 그렇다고 남색을 사자니 글쎄, 네가 내게 사준 목도리와 너무 비슷해서 말이지. 빨간색도 어울릴 거라고 잠깐 생각해 봤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어. 대신 네가 꽤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시계를 하나 발견했잖아? 까만 뱀가죽으로 만들어진 꽤나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어.


구경하며 식어버린 카푸치노를 단숨에 들이켠 뒤에 시계를 집어 들고 카운터로 향했지. 이미 너와의 약속시간에 늦어버렸다는 핑계로, 이젠 선물을 사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 (웃음) 넌 기다리는 걸 싫어하잖아. 정말 미안해. 시계를 점원에게 보여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카운터 뒤쪽 캐비닛에서 새것을 꺼내주더라. 머쓱해져서 시계를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고 하니까 자기가 놓겠다며 다시 받아갔어. 점원이 입고 있던 남색 조끼가 아주 멋졌었는데, 너도 마음에 들어 했을 거야. 선물이세요? 하는 질문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를 넘겨주었지. 빨간색의 상자에 곱게 안착된 시계의 컨디션을 확인하니 점원이 멋지게 포장해 쇼핑백에 담아주며 내게 영수증에 사인해 달라고 했어. 너에게 줄, 이미 식어버린 카페모카를 왼손으로 바꿔 들고 내 서명을 한 뒤에 쇼핑백을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섰지.


건물 두어 개를 지나서 지하철역으로 들어갔어. 약속장소는 바로 다음 정거장이니 대충 10분 내로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 너에게 주기 위해 산 카페모카는 이제 완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고. 쌀쌀한 날씨에 차가운 커피를 주면 넌 되려 화낼 거란 핑계로, 바싹 달아오르는 내 마음을 다스리려 내가 다 마셔버렸지 뭐야. 하지만 너를 위한 가죽시계가 담긴 까만 쇼핑백은 여전히 내 손목에서 덜렁거리며 너와의 만남을 한껏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용서해 주길 바랐지. 역사를 나와서 너에게 전화를 거는데, 미안해서 손이 다 떨리더라. 추워서 잔뜩 얼어버린 목소리로, 신경이 바싹 곤두서있는 목소리로, “도대체 뭐야~” 하는 너의 목소리가 들렸어. 기분 좋게 높은 네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져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할 상황에 웃어버렸던 거, 정말 미안해. 난 네 목소리가 좋아. 늦은 주제에 웃는다고 너도 어이없어하며 같이 웃었잖아. 화가 난 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때.


길 건너 백화점 앞쪽의 횡단보도에 네가 핸드폰을 들고 서있었어. 신호를 기다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바보야, 빨리 와!!" 라며 장난스럽게 혼냈지. 나를 보며 깔깔거리는 너의 몸짓에 웨이브가 들어간 네 머리가 찰랑거렸어. 횡단보도는 길이도 짧고 차도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었으니까 - 오고 가는 차도 없었고, 무엇보다 어서 빨리 너에게 달려가 미안하다고 안아주고 싶었으니까 - 신호가 바뀌자마자 튀어나갔어. 응, 경솔했지.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고, 넌 아마 엄청 화를 냈겠지. 사실 난 잘 기억이 나질 않아. 분명히 한쪽 귀에는 핸드폰을 대고, 반대손으로 너의 선물을 든 채로 흔들고 있었는데. 고통도 없었어. 그냥 아주 커다란, 귀를 찢을듯한 소리가 들리고, 내 몸에 지진이라도 인 듯이 커다란 흔들림이 있었고, 그리고 내 앞에 똑바로 서있던 네가 조금씩 작아지고 멀어지며 대각선으로 기울더니 나와 수직 되게 서있었던 것. 느리게 흐르던 시간 속 까만 스타킹을 신고 있는 너의 가느다란 발목이 더 가까이 시야에 들어왔어. 신고 있던 빨간 구두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내가 사줬던 거지? 아아, 네가 핸드폰을 떨어뜨린 것도 기억이 나. 양손을 바들바들 떨며 뭐라고 중얼이고 있었어. 날씨가 추워서, 내가 가서 안아줬어야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일어나지 질 않더라고. 그러다가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더니 곧 시야를 가려버렸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계속 눈이 감겨서 어쩔 수 없었어.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더라고.


어둠 속에 파묻힌 채로도 의식만은 또렷했는지 주위의 웅성거림,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비명 같은 말소리들과 뇌를 관통하는 듯 한 장난감 자동차 소리 같은 게 나면서 주변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가 조용해졌어. 여러 사람들이 나를 어딘가에 싣고는 문을 닫더라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과 초록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내가 앰뷸런스 안이라는 걸 알았지만, 거기에 너는 없었어. 닫힌 문 밖으로 악을 쓰며 울고 있는 네가 보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너를 말리고 있었어. 선물을 전해줘야 되는데. 우리 오늘 쇼핑하기로 했는데. 내 옆의 사람들에게 너를 태워주라고 말을 하고 싶었는데, 차는 이미 출발해 버렸고, 아까도 말했듯이 목소리가 나오질 않더라. 전신 마취라도 걸린 듯,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었어. 그냥, 무거움 정도?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머리도 무겁게 느껴지고. 숨 쉬는 것도 무거워서, 힘이 들더라.


다시 정신을 차려봤을 때, 하얀 천장이 눈에 보였어. 텔레비전에서나 봄직한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져있던 거야. 우스웠어.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는데, 고개가 움직여지질 않더라고. 사실 시야도 좀 뿌얘서 뭐가 뭔지 제대로 보이진 않았어. 목이 말라서, 물을 가져다 달라고 앞에 서있는 간호사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입도 차마 떨어지지 않더라. 마치 접착제로 콱 붙여놓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더라고. 뭐, 이래 가지고는 물을 가져다줘도 못 마시겠다 싶어서 그만두었어. 얼굴도 깝깝하고 전체적으로 뭔가 불편한 느낌이었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 숨을 쉬려고 할 때마다 뭔가가 계속 내 콧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어. 시선을 힘겹게 조금 내려보면 뭔가 천조 가리 같은 게 눈밑으로 슬쩍 보이더라고. 만져보려고 하니까 손이 움직여지질 않더라고. 두 눈만 끔뻑거리고 있으려니, 엄청 무료한 거 있지. 계속 졸리기도 하고. 내 옆에서 삐빅대는 기계소리가 거슬려서 쉽게 잠들지는 못했지만.


그러다가 네가 들어왔어. 내 눈과 마주치더니 깜짝 놀라 내게로 뛰어와줬잖아. 내 얼굴을 분명히 네가 쓰다듬고 있는 게 보였는데, 어째서인지 네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어.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 마냥 귀도 먹먹하고. 되게 슬프더라. 일어나면 꼭 내 품 가득 안아주리라 다시 맹세했지 뭐. 내가 사 온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네가 보였어. 두 눈이 눈물로 가득해있어서 닦아주고 싶었는데, 손이 올라가질 않더라. 여전히 무겁기만 해. 선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날씬한 너의 손목에 꼭 잘 어울려.


나, 지금 너무 졸리다. 오늘 쇼핑하고 영화도 보기로 했는데 약속도 못 지켰네. 미안해, 용서해 줄 거지? 나중에 가자. 나 한숨만 잘게. 사랑해.


삐이이이이 이 이 이 이 이







p.s.) 2009년에 '뫼비우스의 띠'로 제목 붙였던 글의 수정버전 / 당시 뉴욕에 살고 있었던지라 살던 동네 + 시내의 이미지로 배경을 잡아서 서울의 배경들과 이질감이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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