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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A Jan 18. 2024

성우 수업을 들으며

기자 일을 하면서 마음을 삭이기 위해 애썼다. 처음 내 생각과 달리 기사는 마음으로 쓰는 게 아니었다. 마음으로 쓰는 글은 문장과 단어가 정돈돼 있지 않거나 촌스러울 때가 많았다. 담백하게 정돈된 언어로, 다수에게 통용되는 단어를 쓸 때 글이 더 잘 읽혔다. 잘 읽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좀처럼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발과 귀로 얻은 것을 뇌로 정리하고 손으로 써야 하므로 글은 온몸을 순환해야 한다. 피가 순환하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쓸 때 쓰는 나도, 읽는 독자도 하나의 흐름으로 묶일 수 있었다. 내 글의 흐름을 독자가 '탈' 수 있다.


그러나 슬픔, 우울 등에 가슴이 막히면 글도 막혔다. 이런 현상을 나는 '글맥경화'라고 부른다. 발과 귀에서 얻은 정보가 가슴에 부딪혀 사그라든다. 가슴에 막힌 정보가 한숨으로 빠져나간다. 뇌는 우울과 슬픔에 잠겨만 있다. 그러면 손은 방황한다. 


기사를 쓸 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그랬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슬픔, 불안, 우울같은 감정들은 상대를 매혹시킬 수 없다. 썸타거나 연애 초반이거나 술자리에 할 말 없을 때 풀어내는 진부한 것들. 내가 그런 감정들에 에너지를 쓰면 나를 마주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없었다. 만나서 즐겁지 않으면 사람들은 만나려 하지 않는다. 


내 취재원은 절박하거나 자랑하거나 변명하고 싶어했다. 그런 말에 공감하며 그들을 기쁘게 해주려면 내가 먼저 즐거워서 그들에게 힘을 줘야 했다. 슬퍼하거나 우울할 에너지를 아껴야 했다. 우울하고 슬퍼할 기운으로 읏었다. 우는 힘과 웃는 힘은 다르지 않았다. 불안을 긍정으로 승화해 에너지로 전달할 때 사람들이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억지로 한 발, 한 발 들어가 원하는 답을 얻었다. 


점점 표정이 단순해졌다. 눈빛도 잠잠해졌다. 사용하는 어휘도 줄었다. 감정도 단순해졌다. 우울하거나 열망했다. 더이상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마음을 마주하고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즐겁기보다 괴로울 때가 더 많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겪어야 할 과정이지만 직업인으로 하루를 견뎌내는 데에는 불필요했다. 


성우학원을 다닌 것도 직업인으로서 플랜B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을 뿐이다. 수 많은 점을 찍어두면 우연히 선을 그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문 하나가 닫혔을 때를 예비해 비상구를 만들어두자는 생각이었다. 굳이 왜 성우였냐면 어릴 적 한때 꿈꿨고 특별하거나 비싼 장비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데다 공부를 많이 하는 수고도 필요없을 것 같아서였다. 기자를 하면서 아르바이트 등으로 틈틈이 수익도 있을 같아 보였다. 


취미 없는 인생이 단조롭기도 했다. 대학원 방학 기간을 틈 타 빠르게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게 성우학원이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그동안 삭이느라 애썼던 것을 되살리라 주문했다. 타인을 상상하라 했다. 


사실 타인을 상상하지 않는 건 내가 중시하는 덕목이다. 특히 직장생활에서 그랬다.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들이면 쉬이 피곤해졌다. 사람의 인생과 감정과 전후상황을 고민하느니 시간 자는 중요했다. 상상하며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그 마음으로 들어가 하나가 돼보라 했다. 적어도 대사를 읽는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이 돼라고, 역할을 맡았으면 그 배역으로 살 수 있을 만큼 이입해보라 주문했다. 수많은 타인의 마음과 성격을 내 것처럼 입어보라 했다. 그래야 연기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화요일과 목요일이 특별해졌다. 수업이 있는 날. 내가 그동안 애써 노력했던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 날. 활력과 생기를 주지만 오히려 다음 날에는 더 피곤해졌다. 악몽이 다시 살아나고 감정이 예민해지며 타인의 표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를 상상하게 된다. 연기나 마음이 아니라 그저 먹고 살 수 있는 테크닉이나 스킬, 기술을 배우려 했는데 자꾸 배우는 건 마음이었다. 


죽어서 누워있는 글자를 일으켜 마음을 전달하는 게 성우의 일이었다. 


살아있는 마음을 삭여 쓰는 것과 죽은 글을 살려 읽는 것. 쓰고 읽는 것은 연결된 행위지만 수반되는 에너지나 필요한 덕목은 정반대였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경지다. 글의 도와 말의 도가 다른 게 아니란 걸 알 날이 올까. 아직은 글과 말이 서로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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