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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선물

출산스토리 2

by 권선생

첫째가 돌이 지나고, 나는 막연히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육아보다는 일이 나에게 더 잘 맞는다고 느낀 1년이었다. 때마침 친했던 전 직장 선배가 "이제 애 그만 키우고 일하러 나와야지."라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나는 남편과 상의해 보고 다시 연락드린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문득, 평소보다 늦어지고 있는 생리가 마음에 걸렸다. 이미 예정일보다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테스트를 해봤는데, 이게 웬일... 누가 봐도 너무 선명하게 두 줄이 보였다. '내가 둘째라니? 말도 안 돼...'를 머릿속으로 되뇌며, 테스트기 사진을 남편에게 보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첫째를 낳았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두렵고 겁이 났다.


남편은 너무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남편과 나만의 비밀로 간직한 일주일은 고민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나쁜 생각도 스쳐갔다. 그러나 결국 남편과 상의 후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못 가지는 경우도 많은데, 이건 감사할 일이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결심을 하고 나서, 양가에 임신 소식을 알리자 예상대로 기뻐하시며, 많은 축하를 받았다.


첫째가 있어 정기검진 다니기도 어려웠기에 출산과 산호조리도 모두 친정 근처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임신 초부터 이유 없는 출혈과 잦은 배뭉침으로 안정이 필요했다. 태반의 위치도 앞쪽에 있지만(전치태반) 출산이 가까워지면 정상으로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에 안심하며 임신기간을 보냈다.


임신 20주쯤, 입체 초음파를 통해 성별도 알게 되었다.

"여기 이거 보이지요? 왕자님이네요!" 둘째가 아들이란다. 내가 아들 엄마가 된다니, 낯설지만 새로운 기대감이 들었다.


정기검진이 끝나고, 친정으로 왔다. 첫째를 가정보육하고 있었기에 정기검진 무렵 일주일정도 머물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앉았는데 다리 사이로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내렸다. 놀란 마음에 나는 주방에 있던 엄마를 불렀고, 119 구급차를 타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혹시나 아이가 잘 못 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했고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당직 선생님만 계셨다.

다급하게 내 상태를 살핀 후, 하혈 중 양수도 조금 샜다며 감염여부 때문에 어쩌면 바로 출산을 할 수도 있으니 니큐(신생아 집중치료실)가 있는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을 권했다. 나는 다시 또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고위험 임산부 집중치료실'.

나는 하루아침에 고위험 임산부가 되어 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배 위에 태동기를 달고, 팔에 링거를 맞고, 식사와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누워서 안정을 취해야 했다.

첫째와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나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가 이 상황을 이해할까 싶어 매일 눈물이 쏟아졌다. 또 뱃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두려웠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만약 이런 일이 친정이 아니라, 첫째와 단 둘이 있을 때 벌어졌다면 빠른 대처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집중치료실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담당 선생님의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듣고 퇴원할 수 있었다.


'치료가 되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또다시 하혈할 수 있다. 최대한 무리하지 말고 누워서 지내라. 최대한 아이가 뱃속에서 오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37주 정도까진 버틸 수 있도록 조심해라.'


이후로도 나는 몇 차례 집중치료실에 입원하고 퇴원하고를 반복했다.

입원실의 다른 임산부들 역시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커튼 너머 들어보면, 모든 엄마들을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대신 육아를 도맡아 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그 존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출산이 임박했지만 끝내 태반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전치태반 판정을 받았다. 내가 하혈을 했던 이유도 이 전치태반 때문이었다. 그래도 둘째는 37주가 지날 때까지 내 뱃속에서 잘 기다려 주었다. 이번에는 유도분만이 아닌 처음부터 수술로 시작되니 첫째 때처럼 길고 힘든 고통은 없으리라 믿었다.


오전 11시쯤 나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이른 오후쯤이면 아이를 만날 생각에 무섭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마취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또 한 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수술실이었고, 벽에 걸려있는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물었지만, 곧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모든 후처리가 끝난 후, 담당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첫째 때 난산을 했던 터라 자궁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가 빠져나오면 자연스럽게 태반과 자궁이 분리되어야 하는데, 나는 자궁이 수축되지 않아, 인위적으로 떼어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혈에 긴 시간이 필요했고, 출혈이 멈추지 않았으면 자궁을 들어내야 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고 했다.


나는 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왜 나는 출산이 이렇게 힘이 든 걸까?' 두 번이나 이러는 건 너무 억울했다. '의료기술이 발전했으니 내가 살았지 옛날 같았으면 나는 죽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두렵고 서러웠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 보면, 둘째가 나의 생명의 은인 같았다. 전치태반이 아니어서 내가 대학병원에서 출산을 하지 않았으면 어쩌면 더 큰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험난했던 나의 출산스토리를 떠올리며 깨닫는다.

사실 요즘 육아에 지쳐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아이들임을 잊고 살기도 했다.

두 아이 모두 나에게 오는 길이 험난했던 만큼, 더 큰 사랑으로 키우겠다고 다짐해 본다.


2023.03.23.

둘째의 두 돌의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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