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이던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첫째를 낳기 전, 나는 소위 '여의도 1번지'라 불리는 국회에서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10년 넘게 일해왔다.
워라밸은커녕 최소한의 인간 도리도 쉽지 않을 만큼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19대 선거가 얼마 안 남았던 시절, 외할머니의 발인도 못 보고 장례식장을 떠나야 했으며,
추석기간과 같은 황금연휴에 맞춘 가족여행은 매년 국정감사 준비로 바빠 나만 못 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던 나는 출산 후 육아를 하며 복직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조기 출근과 잦은 야근, 변수가 많은 근무환경, 주말 출근과 지방 출장 등도 열외가 없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두 아이의 엄마로서 그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도 했다.
내 마음은 전업맘과 워킹맘의 갈림길에서 자주 충돌했다.
주변의 전업맘들은 '아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커서 이 소중한 순간을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며
아이는 엄마가 키우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고,
워킹맘들은 '아이들은 금방 크지만, 경력 단절이 길어지만 다시 사회로 돌아가기가 어렵다.'며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워킹맘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일도 육아도 모두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 가정과 나의 삶의 균형을 맞춰며 살아가는 그런 로망.
그러나 애를 둘이나 낳고 나니 평생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도 생겼다.
여의도에서 바쁘게 일하면서도 나는 자기 계발에 늘 관심이 많았다.
1년에 자격증 하나씩 따기,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 등의 목표를 세우기도 했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학위도 취득했다.
그러던 내가 육아만 하며 살다 보니,
'내가 이러려고 석사까지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특히 아이와 놀아주다 지쳤을 때,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러던 올여름, 전 직장 동료였던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네 성격에 집에만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지내?라는 안부인사와 함께
육아하면서도 일하기 괜찮은 직장에서 석사 이상의 졸업자를 찾는 곳이 있다며 나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10년 넘게 한 직장에서만 일했던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순간이었다.
나의 모든 경험이 다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고, 나는 또다시 생각했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경험은 결코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감사하게도 현 직장에서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배려를 받으며 근무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한 직장은 없고 나름의 장단점이 있지만,
아침 10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이라는 물리적인 근무 환경 덕분에
(일이 많을 때는 육퇴 후 남은 업무를 처리해야 하지만,) 아이들을 케어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다.
이렇게 나는 두 번째 명함을 만들어 살고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삶의 활력도 되찾았지만, 애들 워킹맘의 삶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바쁘지만, 그 속에서 엄마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세 번째 명함을 만들어 살 날을 꿈꾸며, 오늘도 부단히 나아가고 있다.
2023.12.14